윤형근 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윤형근 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회고전 개최

작가 사후 유족이 보관해온 작품 공개

당대 예술가·지식인 교유관계도 재조명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 윤형근, 1990년 우에다 갤러리 개인전 작가노트 中-

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으로 알려진 윤형근(1928~2007)의 일대기를 담은 회고전이 마련됐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윤형근’ 회고전을 지난 4일부터 오는 12월 16일(일)까지 서울 종로구 MMCA 서울에서 개최한다.

윤형근 ‘드로잉(1970, 종이에 유채, 35.5x25㎝)’.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윤형근 ‘드로잉(1970, 종이에 유채, 35.5x25㎝)’.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전시 구성은 작가의 삶의 여정에 따른 작품의 변화를 총 4부로 나눠진다. 1부에서는 작가의 작업 초기,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1916~1974)의 영향을 보여주는 1960년대의 드로잉과 작품들이 전시된다. 윤형근의 조형언어가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1부의 드로잉들은 상당부분 처음 공개된다.

2부와 3부에서는 다양한 색채에서 출발했던 그의 작업이 역사와 부딪혀 순수한 검정에 도달한 상태를 표현한다. 작가 특유의 색채인 청색과 암갈색이 섞인 ‘오묘한 검정색’이 담긴 ‘청다색’ 연작을 시작으로, 2000년대 말년 작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작이 엄선됐다.

무엇보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울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작된 작품과 같이 시대의 아픔을 담담히 담아낸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1980년 6월 제작된 작품 ‘다색(1980)’은 피와 땀을 흘리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에 대한 헌사로서, 제작 이후 단 한 번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다가 이번 전시에 최초 공개된다.

서교동 윤형근 아틀리에의 모습이다. 벽 가운데 도널드 저드의 낙품이 걸려 있으며, 조선의 고가구와 도자기 등이 작가의 작품과 함께 놓여 있다.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서교동 윤형근 아틀리에의 모습이다. 벽 가운데 도널드 저드의 낙품이 걸려 있으며, 조선의 고가구와 도자기 등이 작가의 작품과 함께 놓여 있다.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또 8전시실에선 서교동 작가의 아틀리에에 소장돼 있던 관련 작가의 작품(김환기, 최종태, 도널드 저드 등)과 한국 전통 유물(고가구, 토기, 도자기 등)을 그대로 옮겨, 작가의 정신세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와 노트가 처음 공개되고, 많은 양의 사진 자료도 선보여 눈길을 끈다. 아울러, 김환기가 작고 15일전 윤형근에게 남긴 엽서를 포함, 김환기가 윤형근과 김영숙 부부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되어, 작가와 그 주변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한층 풍성한 연구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형근 ‘청다색(Umber-Blue, 1978, 마포에 유채, 270x141㎝)’.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윤형근 ‘청다색(Umber-Blue, 1978, 마포에 유채, 270x141㎝)’.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죽을 고비 넘긴 후 작품 제작 시작한 윤형근

윤형근 작가는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1947년 서울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시절 시위 전력(前歷)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에는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에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했던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윤형근 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윤형근 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장)

 

총 3번의 복역과 1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이른바 ‘인생 공부’를 하게 되고,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경험한 연후인 1973년, 그의 나이 만 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 제작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던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곧바로 진입했다. 이 작품들은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Blue)과 땅의 색인 암갈색(Umber)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것이다.

제작 방법에서부터 그 결과까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이 작품들은 오랜 시간 세파를 견뎌낸 고목(古木), 한국 전통 가옥의 서까래,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흙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는 이렇게 ‘무심(無心)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 전통 미학이 추구했던 수수하고 겸손하고 푸근하고 듬직한 ‘미덕’을 세계적으로 통용될만한 현대적 회화 언어로 풀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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