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현 문학박사

 

▲ 성주현 문학박사ⓒ천지일보(뉴스천지)
한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유림계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을 전개된 배일의식은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무력적인 항일의병전쟁으로 전환되었다. 의병전쟁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전기의병은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전개되었다.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악화된 대일감정으로 촉발된 전기의병은 유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 가장 두드러지게 활동한 의병장은 유인석이었다. 충북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인석 의병부대는 주로 친일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춘천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소응 의병부대, 경북 선산의 허위 의병부대도 이 시기 활동하였다. 그러나 전기의병은 고종의 해산권고 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해산되었고 의병활동도 점차 소멸되었다.

두 번째 중기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1907년 군대해산 이전까지 전개되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내정간섭을 하였다.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하자 유림들은 무장단을 조직하고 일본군과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하였고 보다 강력하게 친일세력을 응징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민종식, 최익현, 정용기 등이 조직한 의병들이었다. 민종식 부대는 충남 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한때 홍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전북 태인, 곡성, 순창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쓰시마로 유배된 후 순국하였다. 정용기는 경북 청송을 중심으로 산남창의진을 편성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하였다.

세 번째 후기의병은 군대해산 이후 1910년 일제 강점 때까지 이어졌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결과로 일제는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를 해산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으로 전환하였고, 전국적으로 의병의 대일항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김덕제와 민긍호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강원도, 경기도, 충북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여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이처럼 의병전쟁이 확산되는 가운데 각지의 의병부대는 연합전선을 형성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집결한 의병 1만여 명은 경기도 양주에서 13도창의군을 결성하고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려던 연합의병은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허위가 지휘하는 의병은 일제의 선제습격으로 패함에 따라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였다. 이후 일제는 호남지방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대토벌작전을 자행, 국내에서 의병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와 같은 의병전쟁은 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한 대표적인 민족운동이었으며, 그 중심세력은 유림이었다. 그러나 중기의병 이후 평민들의 의병부대가 크게 조직 활동하였음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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