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석곽묘 작업 사진. (출처: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고려청자 석곽묘 작업 사진. (출처: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청동기~조선 유적 대규모 발견

[천지일보=장수경·김미정 기자] 땅 속에서 청동기 시대 유물이 나왔다. 고려와 조선 등의 여러 시대의 유물도 대거 발견됐다. 지금껏 한 번도 파헤쳐보지 않았던 땅이어서 유물이 발견되자 관심은 더욱 뜨거웠다.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사업부지. 인천도시공사가 시행하는 검단신도시는 원당·당하·마전·불로동 일원 등에 조성되며 1118만 1139㎡에 인구 18만 3720명, 주택 7만 5071가구가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이곳 검단은 과거 김포군에 속했었다. 검단의 검(黔)은 검은색을, 단(丹)은 붉은색을 뜻하며, 오래전부터 이 지역이 서해안으로서 검붉은 갯벌이 많아 붙은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어떤 장소일까. 또 어떤 유물이 잠들어 있었을까.

현장설명회 모습 (출처: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현장설명회 모습 (출처: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주거지·무덤 등 발견돼

검단신도시 사업부지의 문화재 발굴조사에는 총 6개 기관이 참여했다. 이중 호남문화재연구원은 인천 검단신도시 개발사업I~III 지점에 대한 문화재 발굴 조사를 지난 2015년 12월부터 진행했다. 그 결과 신석기 시대 주거지를 비롯해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원삼국~조선 시대 무덤 수백여기가 발굴됐다.

구체적으로 신석기 시대 주거지를 비롯해 청동기 시대 주거지 126기, 원삼국 시대 분구묘(墳丘墓)와 삼국 시대 나무널무덤(목관묘, 木棺墓), 통일신라부터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돌덧널무덤(석곽묘, 石槨墓) 51기가 발견됐다. 또 고려부터 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나무널무덤 200여기 등 다양한 유구도 나왔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유물 (출처: 문화재청,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유물 (출처: 문화재청,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청동기 시대 유물

이 중 의미가 큰 것이 청동기 시대와 고려 시대의 유적·유물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 능선과 남사면을 따라 81기(II-1확인조사지역)가 확인됐다. 주거지는 하단부의 유실이 심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평면형태는 방형, 장방형, 세장방형으로 구분되며 구릉 능선과 사면부를 따라 조성돼 있다.

내부 시설로는 ‘노지(난방과 음식 마련을 위한 화덕 자리)’와 벽구, 단시설 등이 확인됐다. 규모가 큰 주거지는 대가족이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은 반달 모양 돌칼, 석촉, 석부, 방추차 등 다양한 석기류가 주를 이뤘다. 일부 주거지에서는 민무늬 토기 등이 발견됐다.

한수영 호남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청동기시대 전기 유구는 우리현장에서 130여기가 나왔다. 조사 구역인 검단지구 전체를 합하면 460기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기원전 11~8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라며 “이미 이곳은 3천년 전 최대 주거지이자 신도시였다”고 전했다.

고려시대 돌덧널무덤(석곽묘)에서 발견된 유물(출처: 문화재청,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고려시대 돌덧널무덤(석곽묘)에서 발견된 유물(출처: 문화재청,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고려 시대 유물

고려시대 무덤으로는 석곽묘(돌덧널무덤)와 목관묘(나무널무덤)가 발견됐다. 유물은 일부 석곽묘에서만 출토됐는데 완, 병 등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된 석곽묘와 청자완, 도기병, 청자병, 청자잔 등 고려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석곽묘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29호 석곽묘에서는 과형주자를 비롯해 청자잔과 접시, 잔탁, 대발 등 다기가 일괄 출토돼 주목되고 있다. 다기 세트는 태토와 기법 등으로 보아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태토에 철분의 함량이 거의 없는 것 등으로 보아 12세기 전반 경에 전남 강진이나 전북 부안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 책임연구원은 “참외 모양의 청자는 장흥이나 용인 등 두 세 곳에서 나오긴 했으나, 찻잔과 차받침 등 세트가 출토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강진이나 부안에서 제작된 청자는 국왕에게 올려 졌는데, 이를 왕이 하사해 준 것으로 추측된다”라며 “무덤 주인은 귀족계층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Ⅱ-1지점 고려 시대 29호 돌덧널무덤(출처: 문화재청,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Ⅱ-1지점 고려 시대 29호 돌덧널무덤(출처: 문화재청,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백제 ‘비류’ 전설의 흔적 없나

조사가 진행 중인 이곳 검단은 역사적으로 백제 비류 설화와 연관이 클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다. 비류는 전설 속의 인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朱蒙)의 아들이자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의 형으로 전해지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는 온조와 함께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강유역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때 백성을 나눠서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자리 잡았고, 비류는 오늘날의 인천 부근인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는데,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자신이 거느린 백성은 편히 살지 못했다고 한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의 문화재 현장 발굴 모습(출처: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호남문화재연구원의 문화재 현장 발굴 모습(출처: 호남문화재연구원) ⓒ천지일보 2018.8.6

 한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발견된 유물을 보면 기원전 3천년전에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기원전 800년에서 100~200년 정도의 것이 나온다. 그리고 기원 후 3세기 것이 나오는데 그 중간인 500~600년 간의 흔적은 없는 상태다.

그는 “우리 생각에는 그 중간을 메우는 게 비추홀 비류 이야기”라며 “비류가 백제를 건국한 것이 기원전 1세기다. 설화에 보면 물이 짜고 오래 이 땅에 있지 못하고 흩어졌다고 하는데, 물에 염분이 많았고 농사기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편 호남문화재연구원의 문화재 발굴 조사는 90%가량 진행된 상태이며, 8월 말에 종료될 예정이다. 발견된 유물은 2년 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국가 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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