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얼마 전 흥미로운 뉴스 하나를 접했다. 강원도 교육청이 일류대 합격자 수를 알리는 현수막을 자제하라고 일선 학교와 학원들에게 요청했다는 것이다.

일류대 합격자 수와 소위 출세한 동문을 알리는 현수막이 학교 간 위계 서열화와 지나친 경쟁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현수막은 공해에 가까울 뿐 아니라 쓸데없이 예산까지 낭비한다고 했다.

강원도 교육청은 공문을 통해 “좋은 성적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합격을 축하해야 하지만 합격과 출세한 소수만을 위한 축하 현수막은 대다수의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성적은 비록 낮지만 최선을 다해 생활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전했다. 현수막 게시가 입시경쟁사회, 출세지향주의, 학벌사회 조장 등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소외감을 안겨 줄 수 있는 비교육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옳은 소리다. 학교에서 들려오는 뉴스라는 것이 주로 폭력, 왕따 등 불쾌하고 걱정스런 내용들이 많은데, 모처럼 귀가 솔깃해지는 기분 좋은 뉴스다. 교육청의 지침이 현장에서 얼마나 잘 지켜질지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와 같은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신선하다.

해마다 입시철이면 어느 학교나 할 것 없이 ‘어느 대학 몇 명 합격’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린다. 거기엔 ‘경축’이라는 문구가 함께 실린다. 여기에 실린 학생 수가 많을수록 좋은 학교라 여겨지고, 사설 입시 학원들은 다니지도 않은 학생들 이름을 빌어 와 합격자 수를 뻥튀기하기도 한다.

동문 중에 누가 고시에라도 합격하면 반드시 현수막이 내걸린다. 경축, 몇 회 졸업생 아무개 사법고시 합격. 학교 교문 뿐 아니라 마을 어귀 동구나무에도 걸리고 전봇대 사이에서도 나부낀다. 사실 현수막에 이름을 올린 학생들과 부모들은 절로 어깨가 뿌듯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르겠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과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우리는 그걸 잘 알면서도 잔인하게 모른 채 해왔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루저’들이 생겨난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이 진정 ‘루저’여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들을 열등하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낡은 사고가 빚어내는 비극적인 풍경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사농공상 서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격이야 어찌됐던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게 용서된다. 추앙받고 존경받기까지 한다.

사회는 소수의 명문대 졸업생들 때문에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고시에 합격한 그들 때문에 사회가 더 윤택해지고 정의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소수의 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온갖 혜택을 안겨 준다.

가난한 집 아이가 소위 명문대라는 곳에 들어가면 박수를 받을 만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선한 존재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 중에는 ‘빛나는’ 졸업장을 평생 훈장처럼 달고 다니며 거들먹거리거나 철옹성 같은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갖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어느 고교 어느 동네 출신이라 하여 소위 출세한 그들끼리 패거리를 이루어 저희들끼리 잇속을 챙기거나 불순한 짓거리들을 하기도 한다. 영포회다 무슨 향우회다 해서 나라를 시끄럽게 하기도 한다.

<제빵 왕 김탁구>에서처럼 세상에서 빵을 제일 잘 만들거나 벽돌을 잘 쌓고 시멘트 반죽을 잘 하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대접받고 존경 받는 사회, 그게 제대로 된 사회다. 좋은 대학 나오고 고시 합격한 것만으로 평생 우쭐대며 사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운 우리 마음 속 현수막들을 걷어치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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