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닐까 한다.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는 이 유명한 말은 이른바 ‘지강헌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지강헌 사건은 1988년 10월 16일 서울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 탈주범 4명이 들어와 한 가족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하다 10시간 만에 자살 또는 사살된 사건이다.

88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죄수들이 호송버스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 12명이 서울로 사라졌으며, 이들 중 4명이 한 가정집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였다. 인질범 중 한 명인 지강헌은 마지막 순간 비지스(Bee Gees)의 ‘홀리데이’를 들으면서 깨진 유리조각으로 자기의 목을 그었고, 이를 인질을 해치려는 것으로 착각한 경찰특공대가 쏜 4발의 총을 맞은 지강헌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지강헌은 강도와 절도를 상습적으로 저질러 온 범죄자다. 그런데 왜 그가 남긴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그토록 오랜 시간 회자되며, 그를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인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인가.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자, 이 사회에 대한, 정치와 권력, 부와 가난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에 대해 분노한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탈주범들은 10~20년까지 자신들에게 내려진 과중한 형량과 이와는 반대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에게 내려진 형량의 차이에 불평등함을 느꼈고, 이것이 탈주 계기가 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새마을 비리사건으로 수십억원에 이르는 사기와 횡령으로 구속된 전경환씨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2년 정도 형을 살다 풀려났다.

또한 이들은 당시 교도소 내에서 행해지는 구타와 차별 등에도 불만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이들은 없었다. 훗날 인질 중 한 명은 “탈주범들은 실제로도 매우 인간적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나를 인질로 삼아 빠져나가라’고 요구했을까. 그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을 수시로 했었다”고 회상하며, 이들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인간적이었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까지 이해되거나 용납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왜 이들이 탈주하게 됐는지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상황이 지금과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하는지도 모른다.

“전경환이는 수십억 해놓고 징역 7년, 난 556만원 해놓고 17년. 이것이 대한민국이야!” “어떻게 범죄자가 판·검사를 살 수 있는 거야?” “돈 많으면 죄가 없는 거고 돈 없으면 죄가 있는 거야! 대한민국 법이라는 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당시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이며 방송사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외친 이 말이 지금도 회자되는 건, 여전히 대한민국 법이 부와 권력, 기득권 세력에게는 관대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폭언과 폭행 등 갑질 의혹을 받고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겨졌다. 이 전 이사장은 특수상해, 상해, 특수폭행, 특가법상 운전자 폭행, 상습폭행, 업무방해, 모욕죄 등 총 7건의 혐의가 적용됐다. 지난 5월 31일 경찰은 이 전 이사장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박범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6월 4일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이어 증거인멸이나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충분히 구속의 이유가 있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함에도 구속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많은 이들이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떠올리고 있다.

이는 비단 이 전 이사장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한진그룹 일가의 갑질에 이어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대란으로 시작된 갑질 폭로, 지난해 ‘공관병 갑질’이 폭로돼 결국 옷을 벗은 박찬주 전 육군대장 등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갑질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주 전 육군대장은 갑질뿐 아니라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돼 구속됐지만 지난 1월 구속 4개월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외에도 참으로 많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일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30년 전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이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여전히 부와 권력에 의해 때로는 축소되고 은폐되고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대한민국 대다수의 ‘씨알(민중)’들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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