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구두를 만들 때 필요한 장비들이 진열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구두를 만들 때 필요한 장비들이 진열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국립민속박물관,‘수제화 장인’ 특별展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구두는 구한말 일본어 ‘구츠(くつ)’에서 유래했죠.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구두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이전부터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 있었습니다.”

22일 박상범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원은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특별전이 열리는 전시실 한쪽 유리관 안에 담긴 ‘징신’을 보이며 이같이 설명했다.

유혜(油鞋)라고도 하는 징신은 삼국시대 이래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름 0.7㎝ 정도의 원형 돌기를 밑창에 촘촘히 박혀있고, 앞뒤로 얇은 쇠붙이 징도 박아 방수도 잘 되며 수명도 길게 하고 진흙이 달라붙는 것도 막았다. 박 학예연구원은 “징신은 이탈리아 명품인 ‘토즈’와 비슷한 모양”이라며 “토즈는 현대의 높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데, 우리 선조들은 과거부터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특별전에서 공개된 조선시대 징신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특별전에서 공개된 조선시대 징신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언제부터 구두 신었나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구두를 신었을까. 바로 고종 때 부터였다. 고종실록(고종 32년 11월 15일)에 따르면, ‘의복제도는 외국 제도를 채용하여도 무방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서양식 의복이 인정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 학예연구원은 “당시에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신발과 옷을 입었다”라며 “그런데 개항으로 외국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오면서 구두도 들어왔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때부터 사람들이 전통복장에 구두를 신기 시작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는 불법이었다”며 “그러나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구두를 신는 사람 수가 많아지자, 정부는 공식적으로 허용한다는 내용의 법을 선포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시대적인 상황은 당시에 남겨진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흑백 사진에 담긴 한 남성은 갓에 도포를 착용하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또 고종황제가 서양식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이 초상 사진에 담겨 있다.

고종황제가 서양식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흑백 초상 사진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국립고궁박물관)ⓒ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고종황제가 서양식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흑백 초상 사진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국립고궁박물관)ⓒ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우리나라 최초의 양화점

구두를 신는 것이 허용되자 본격적으로 양화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화점은 1898년경 설립된 ‘이익규 양화점’이다. 이익규 양화점은 쌀 한 가마 값이 구두 한 켤레의 값이었던 시절, 군 서기의 봉급이 12원일 때 수제화 일등 직공은 48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이후 박덕유씨가 이익규의 양화점을 인수(1900년)했다. 매일신보(1936년 1월 15일자)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이익규 양화점을 인수할 당시에 일등 직공으로 유명근, 강한구가 있었고 구두 가격이 9원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후 인천에 사는 주동건씨가 국내 최초로 ‘양혜목형제조기’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구두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 진 것이다.

구두가 점점 인기가 높아지자 1920~1930년대에 발행된 ‘신여성’ 잡지에도 구두를 신고 있는 여성이 그려졌다.

1936년에는 송림화점이 문을 열었다. 서울 을지로 수표교 인근에 위치한 송림화점은 4대(83년)째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47년에는 칠성제화가 개점했고 1950년에는 최초 수제등산화가 개발됐다. 1954년에는 금강양화가 개점했고 기성화 1호인 ‘리갈’이 출시됐다. 1961년에는 에스콰이어 제화가 개점했다. 1967년 열린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는 배진효씨가 한국 최초로 제화 부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특별전에 비치된 장인의 구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국립민속박물관의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 특별전에 비치된 장인의 구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4

◆하늘과 땅 접촉의 매개체인 발 보호

한편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하늘과 땅, 사람이 만물을 구성한다고 믿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사람을 하늘과 같이 소중하게 여겼다. 또 한의학에서는 사람을 ‘우주를 담는 소우주’로 여겼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다니는 사람은 하늘과 땅의 접촉, 즉 만남의 매개체였다.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발이었고, 이 발을 안전하게 편안하게 하는 것이 ‘신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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