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된다. 남겨진 유물은 그 당시 상황을 말해 주며 후대에 전해진다. 역사는 미래를 바라볼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같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을 보관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장소가 박물관이다. 이와 관련, `이달에 만나본 박물관' 연재 기사를 통해 박물관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4000번의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진다는  한산모시  작업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4000번의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진다는 한산모시 작업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서천 한산모시관 
1500년 역사·전통 이어져
2011년 유네스코 등재돼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산모시는 잠자리 날개처럼 곱고 예쁘죠. 통풍도 잘 돼서 시원해요.”

11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모시관에서 만난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방연옥 선생은 모시를 짜는 전통베틀에 앉아 손끝을 쉴 세 없이 움직였다. 그의 허리에는 나무로 된 요대(허리띠)가 둘러있고, 신고 있는 흰 고무신 한쪽에는 긴 줄이 달려 있었다. 이 줄은 전통베틀과 이어져 있었다.

이처럼 허리와 발 등을 이용해 움직이는 전통베틀은 한산지역의 옛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1500년 역사의 한산모시는 4000번의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졌다. 위대한 유산을 계승하고 천년의 미(美)를 이어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모시인의 삶. 오늘날에는 개량베틀이 나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거친 풀에서 아름다운 모시가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여인들의 숭고한 땀과 고통, 인내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 전통섬유 부문 중 가장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됐다. 한산모시짜기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인  방연옥  선생이  베틀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모시를  짜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인 방연옥 선생이 베틀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모시를 짜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우리나라 모시 역사

‘저마’는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재배돼 여름철 옷감으로 널리 사용돼 왔다. 저마는 우리말로 ‘모시’라고 불려 왔으며, 모시베의 의미로 ‘저포’라고도 했다. 모시라는 명칭은 송나라 손목이 저술한 백과서인 ‘계림유사’에서 저(苧)를 모(毛), 저포(苧布)를 모시(毛施)베라고 부른다는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구전에 의하면, 삼국시대 때 모시풀을 원료로 한 옷감이 처음 등장하게 됐다. 통일신라시대(경문왕) 때에는 저포를 해외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 있다. 특히 중국에 비해 제직기술이 절정에 이루었고 이를 통해 모시는 대표적인 특산직물로 자리매김했다.

고려시대에는 직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져 백저포는 당시대의 기본의상으로 서민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입었고, 화폐를 대신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모시는 관복, 제례복, 갑옷, 일상복 등 귀천에 관계없이 다양한 복식에 사용됐다.

모시를  짜기  위해  방  선생의  발에  긴  줄이  달려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모시를 짜기 위해 방 선생의 발에 긴 줄이 달려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이때 수요가 공급을 따르지 못해 세모시와 관련된 폐단이 발생했다. 이에 중종 17년에 금제령이 내려지면서 직조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해 직물의 질과 생산이 한발 퇴보했다.

하지만 한산을 비롯한 저산팔읍(모시가 생산되던충청도의 여덟 개의 읍)에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 일제강점기 초까지 장날을 따라 보부상이 하나의 경제권을 형성했고 말기에 이르러 저산팔읍 중에서 가장 우수한 모시로 자리 잡았다. 그 명성도 전국에 떨치게 됐다.

해방 후 시장수요가 증가하면서 ‘저포생산 5개년계획’을 세워 모시재배를 장려했으나 1968년 이후 수익성 감소와 화학섬유의 발달로 생산이 감소추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생활수준의 향상과 천연섬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산모시의 우수성이 재인식되고 수요가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한산 모시관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한산 모시관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건지산 전설과 한산모시 유래

충남의 최남단에 위치한 한산은 고대부터 모시 생산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모시 생산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산에서 모시가 언제부터 재배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건지산’에 올라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했으며 이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해 모시짜기의 시초가 됐다고 구전으로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모시의 품종은 크게 토종인 모시와 개량종인 청재모시가 있다. 한산지역에서 재배하는 모시는 청재모시로 약 40여년전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재모시는 조선모시에 비해 잎이 크고 줄기가 굵으면서도 연해 째기가 쉽고 빨리 자라 수확량이 많다.

한산지역의 모시는 4월경에 이식해 연 3회 정도 수확한다. 5월말~6월 초에 수확하는 것을 ‘초수(初收)’, 8월에 수확한 것을 이수(二收), 서리가 내리기 전 10월에 수확한 것을 ‘삼수(三收)’라고 하며, 이수 때 수확한 것이 가장 좋다. 모시와 삼베는 씨가 다르다고 한다. 또 세 번 수확하는 모시와 달리 삼베는 1년에 1번만 수확한다.

한산을 포함한 서천지역은 연평균 기온이 12.6도로 중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모시지역에 비해 기온이 1도 가량 낮다. 모시를 삼을 때에 손가락으로만 비벼서 꼬는 두 곳과 달리 한산에서는 짼 모시를 무릎 위에 올리고 손바닥으로 비벼 잇는 방법을 사용해 가장 특색 있다. 한산모시는 섬유의 굵기가 고르고 질겨 모시 표면의 결이 곱고 세탁 후에는 잔털이 많이 생기지 않는다.

태모시 만드는 과정에 모시관에 사진을 통해 설명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태모시 만드는 과정에 모시관에 사진을 통해 설명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모시짜기 약 4개월 걸려

모시가 완성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모시밭 수확을 시작으로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꾸리감기, 모시짜기 등을 거쳐야 한다.

방 선생은 “모시 수확부터 약 4개월의 과정을 거쳐야 모시 한필을 완성할 수 있다”며 “‘모시 한필을 만들려면 침 세 대, 땀 서말(3말)’이라는 옛말도 있다. 모시를 짤 때 ‘침’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모시를 쪼개거나 이어붙일 때 침을 발라야 매끄러운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시를 짜는 새로운 기계가 개발된다 해도,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전통방식은 따라 올 수는 없는 모양이다. 전통방식을 직접 보여준 이날도 방 선생은 도중 도중 끊어진 모시에 누에고치를 비벼주고, 그의 침을 바르는 등 전통 그대로의 방식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방 선생은 “모시를 짜기 위해 베틀에 오를 때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단정한 마음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스승인 문정옥 선생에게 배웠다”라며 “한산모시의 맥을 잇는 후계자들도 이 같은 마음을 늘 간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한산모시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우리 전통의 우수함을 알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모시매기 과정. 풀솔로 콩풀을 먹이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모시매기 과정. 풀솔로 콩풀을 먹이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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