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김덕수

예(禮)란 무엇인가? 동양 음양오행의 사상에서는 예를 불(火)의 성정(性情)에 비유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존인비기(尊人卑己, 상대방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요, 달리 말하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몸가짐이라 할 수 있다. 곧 질서(秩序)를 의미한다.

예의 일반적인 행위 중 하나가 절인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행위에는 머리를 숙이거나 조아리는 동작이 보편적이다.

절하는 모습을 보면 공부(工夫)가 얼마큼 됐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절하는 그 몸가짐 가운데 자신의 내면 수양(修養)의 경지가 자연스레 표출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요즘은 성속(聖俗)을 망라해 그 절이 온전히 익은 모습을 보여주는 이가 드물어 아쉽다. 또 절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혀 그 좋은 수행을 자기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부류도 있다.

절은 이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며 의식이다. 법당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삼배(三拜)로부터 21배, 108배 1000배, 3000배 등 그 수행방법에는 한이 없다.

요즘 불자들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다들 마음이 급해졌다. 절하는 것을 봐도 제대로 호흡에 맞추어 하기보다는 많이 하고, 빨리 하는 데 그 가치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절집마다 절을 잘하고 많이, 많게는 수만 배씩 하는 보살들 많다. 그러나 대부분 마음이 조급(躁急)하고 호흡은 들떠 있으며 몸은 틀어지고 기공(氣穴)이 막혀 있는 경우가 많다.

절이 이치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절을 제대로 수행하면 마음이 착 가라앉고 호흡은 고르게 되며 몸은 더욱 반듯해지니 기혈(氣穴)이 열리게 된다. 이 절 한 배로 세상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겠다는 정성을 들이면 기운이 단박에 숙연(肅然)해진다. 그러면 마음이 번잡하지 않고 차분해지며 평온해져 당연히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우러나 절하는 속도도 천지의 운행질서에 맞게 조절되어 느긋해진다.

만약 108배 수행을 한다면 최소한 30분 이상 시간이 걸리도록 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흡(呼吸)에 맞추어 절하는 것인데 먼저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앉아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 때까지 숨을 내뱉는다.

이때 얼마나 온전히 숨을 다 뱉어내느냐가 관건인데 뱃가죽이 등에 착 붙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혹 부처님의 고행상을 본 적이 있는가? 호흡은 몸의 독기(濁氣)를 얼마나 많이 토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면 된다. 처음에 될 수 있는 한 많이 숨을 뱉어내려고 하다 보면 서서히 숨이 골라지면서 온전히 내뱉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날숨이 온전히 될수록 머리는 맑아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을 내쉬는 중간에 숨을 다시 들이쉬기 때문에 몸에서 발생한 탁기를 다시 폐로 가져가 CO계열의 가스가 다시 혈액을 통해 뇌로 운반되게 된다. 그래서 머리가 명징(明澄)해지지 않고 늘 찡찡한 것이다. 우리말 가운데 ‘너는 왜 그리 멍청하냐’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호흡이 온전히 되지 않아 뇌로 신선한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 머리가 멍해지고 탁해졌다는 뜻이다.

들숨은 음(陰)이요 날숨은 양(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들숨과 날숨이 조화롭게 되면 곧 인간의 몸 안에서 음양이 조화롭게 교합된다. 음양(陰陽)이 올바르게 교합하면 곧 이것이 자연에 순응(順應)함이요, 질서가 제대로 잡혀가는 것이다. 몸에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곧 몸이 건강하다는 뜻이 된다.

우리 인체 내에서 들숨과 날숨의 조화가 깨지면 곧바로 몸의 순환의 질서가 무너져 어딘가에서 순환계가 지체되고 서서히 막혀 결(結)이 생기게 된다. 이 과정이 일정기간 계속되다 보면 몸에 병(病)이 자리하고 특히 화가 쌓여 성질을 자주 내게 된다. 화가 자주 분출되면 짜증스러워지고 몸에 화평한 기운이 없어져 조화와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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