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체류… 삼정승 정사 논의해 지명 유래

불사이군 조견 등 충·효·열 역사·설화 많아

인륜정립 ‘충효 도시로 양성’ 여론 높아져

정문부·박세당·신숙주 등 곳곳에 역사인물

의정부시 장암동 서계박세당 고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천지일보 의정부=이성애 기자] 의정부 장암동 서계 박세당 고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천지일보 의정부=이성애 기자] 서울 북부인 도봉구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의 고장 경기도 의정부(議政府). 이 지역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학자,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배출됐던 곳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어버이날을 맞아 효도하는 정부를 약속했다. 의정부 시민들 사이에는 ‘효시(孝市)’로서 인륜을 바로 세우는 충효교육의 산실로 의정부를 단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의정부(議政府)는 본디 조선시대 백관(百官)의 통솔과 서정(庶政)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기관이다. 조선시대 행정기관명이 지명이 된 것과 관련해 설화가 전해온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게 된다. 태종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부름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는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무학대사의 노력으로 이성계가 회룡사 입구 전좌마을(임금이 좌정했던 자리)에서 태종과 만나게 된다. 이후 이성계가 한동안 머물며 3정승을 포함한 대신들과 정무를 의논하며 지냈다고 해서 의정부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의정부 장암동 서계 박세당 고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천지일보 의정부=이성애 기자] 의정부 장암동 서계 박세당 고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지명에 얽힌 충효 설화

의정부시에는 곳곳에서 충·효·열에 얽힌 설화가 많다. 송산동이라는 지명은 고려말 송산 조견(趙狷)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며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외면하고 은거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곡동은 충신열녀와 관련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안산김씨와 평산신씨가 강원도 금성부 산곡간으로 피난했는데 갑자기 왜병을 만나자 김씨는 품고 있던 은장도로 신씨는 물에 투신해 각기 자결했다. 1592년 6월 6일의 일로 두 동서가 함께 정절을 지켰다 하여 이듬해 충신열녀라는 정려를 받았으며 영의정 이호민은 쌍절비문을 지어 칭송했다.

귀락은 포천시 소흘면과 경계를 이루는 의정부시의 최북단 마을이다. 조선 영조 때 평안도 도사 박해문이 은거해 살았던 곳이다. 하루는 그의 가노들이 마을 이름이 없어서 불편함을 털어놓고 이름을 지어 줄 것을 간청하자 “내가 이곳에 돌아와서 여생을 즐겁게 지낸다”며 마을이름을 ‘귀락(歸樂)’이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축석령에는 효자설화가 전해진다. 300여년 전 포천 어룡리에 오백주라는 사람이 부친이 위독하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부친의 병간호에 전념했다. 병세에 차도가 없자 하늘을 탓하며 탄식만 하는데 꿈에서 산신령이 크게 꾸짖으며 “네 아비의 병은 석밀을 먹으면 낫는데 게으름만 피우고 있느냐”고 호령하자 그는 석밀을 구하기 위해 정과 망치를 들고 온 산을 헤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됐다.

그는 “내가 죽으면 부친을 누가 돌본단 말인가” 통곡하자 호랑이는 간데없고 바위만 남아 바위틈에서 석밀이 흘러 나왔다. 오백주의 부친은 석밀을 먹고 병이 완쾌됐으며, 범바위라 부르는 이곳에서 매년 고사를 지내고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고 한다.

의정부시 가능3동사무소 옆 은혜유치원 자리에 직곡산장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흥선대원군이 명성왕후의 세력에 밀려 정계를 은퇴하고 한동안 칩거생활을 한 곳이다. 이곳 산장을 지나는 직통길은 ‘흥선로’ ‘흥선지하도’ ‘흥선로타리’라는 명칭이 명명됐다.

신숙주 묘.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신숙주 묘.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신숙주 묘.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의정부의 역사적 인물

의정부에는 학덕을 겸비한 명사가 많다. 먼저 실학자 서계 박세당 선생이 있다.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함경북도병마평사 등 관직을 두루 거친다. 40세 즈음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직을 버리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는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저서로 농사에 관해 쓴 ‘색경’과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 등이 있다.

북관대첩비의 주인공 의병장 정문부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정문부 장군은 문신이면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임란 당시 북관에서 얼마 안 되는 의병으로 2만명의 왜군을 대파했던 영웅이다. 이 같은 사실을 적은 것이 바로 유명한 북관대첩비다. 1624년 이괄의 난에 관계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으며 그때 나이 60세였다. 그 뒤 좌찬성이란 높은 벼슬을 추증 받았다. 용현동에 정문부 장군묘가 있다.

신숙주(좌) 서계 박세당(우) 영정.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천지일보 의정부=이성애 기자] 신숙주(좌) 서계 박세당(우) 영정.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4

신숙주(1417~1475) 선생은 조선 세종 때 학자로서 한글창제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그의 저서는 성종의 특명으로 간행된 보한재집 17권을 비롯해 세조(1460) 여진정벌을 마치고 북정에 관한 것을 편찬한 북정록 6권, 세종 25년(1443)일본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견문록인 해동제국기 1권과 그밖에 동국정운, 사성통고, 오례의, 경국대전 등이 있다.

충북 구봉영당에 모셔져 있던 보물 제613호 신숙주 선생 초상의 영인본 봉안식이 지난 4월 21일 의정부 신숙주선생 묘역에서 거행됐다. 의정부시는 신숙주선생 초상 영인본이 고산영당에 모셔 묘역을 찾는 시민 학생 등 방문객에게 나라의 충신으로서의 귀감이 되는 얼을 전달하고 나아가 한글창제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길 뜻깊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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