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독립운동가 김종설 박사

 

 

항일 결사조직 보며 자극 받아
해방 전까지 옥고생활 치러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독립운동가들을 주축으로 우리 국민들은 빛을 보기 위해 35년간 일제에 투쟁했다. 그 결과 올해로 우리나라는 일제에서 벗어난 지 65년째를 맞이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고 있는 터. 그 중에 어렵사리 또는 운 좋게 목숨을 보존해 온 운동가들이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의 격동기 과정을 몸소 경험했다.

◆ 광복 꿈꾸며 보낸 청춘

김종설(88) 박사도 청춘이 한창인 시절 모국의 광복을 위해 침략자에 대항했다. 김 박사는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의학부에 입학,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경기중학교는 제주도부터 함경북도까지 전국에서 수재들만 모아 놓은 학교였어요. 당시 일본인들은 똑똑한 학생들을 한데 모아 놓고 일본식 교육으로 세뇌시키려 했죠. 그러나 경기중학교 학생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은 비밀결사조직인 조선인해방투쟁동맹(CHT) 등을 만들어 일제에 철저히 반한 행동을 했죠.”

경기중학교 5학년(18세)으로 재학 당시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지만 CHT 동급생들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들은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일을 진행했으나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이 CHT에 대한 정보를 입수, 핵심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을 진행했다. 그렇게 고문을 당한 학생들 가운데 몇몇은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학우들의 열심을 보고 김 박사는 자극을 받았다. 그는 대학생이 된 후 독립운동단체인 건국동맹 청년부에 가입하면서 실무를 맡았다. 그는 건국동맹의 중심인물이었던 여운형 선생과 다른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독립협동당(협동당)의 당수인 김종백 선생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학생징집을 반대하는 운동도 활발히 펼쳤다.

◆ 빛 되찾기 위한 험난한 길

우리나라에 큰 어두움이었던 일제로부터 빛을 되찾는 일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김 박사 역시 1944년 12월에 전남경찰부에서 2개월간 조사를 받고 옥고생활을 치른 것.

“옥고에서 6개월간 생활했습니다. 전남경찰부에서 2개월간 조사를 받은 후 경기도경찰부로 이송됐죠. 그곳에서 협동당 사건에 연루돼 다시 2개월간 취조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이송됐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으로 정식재판을 받지 않고 광복을 두 달 앞두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네요.”

그는 일제강점기 말에 독립운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서훈을 받지 못했다. 그동안은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가 최근에 와서 신청했으나 보훈처에서는 증빙자료가 미비하다며 계속 보류상태로 머물고 있다. 서훈을 받지 못해도 자신은 괜찮단다. 그는 주위에서 힘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말을 전했다.

◆ 의학도로서의 삶

광복 후 김 박사는 의학도의 삶을 살아왔다. 국립의료원, 한양대 의과대학 내과 주임교수, 동국대 의과대학장 등 의학계에서는 굵직한 부분을 도맡았다. 아울러 한국전쟁 즈음에는 해군 군의관으로서 의사의 의무를 다했다.

동리(凍梨, 90세)를 내다보고 있는 지금도 그는 의사다. 매주 목요일마다 참전유공자 등 보훈대상자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보고 있다.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가 돼 버렸네요. 일제 치하에 있었던 이들이 지금은 하나둘 씩 사라지고 있죠. 그야말로 저 같은 사람들이 역사의 산 증인인데 시간을 거스를 수 없으니 호호백발 노인이 되었네요. 그때만 하더라도 청춘이었는데 말이죠. 허허허.”

그는 인터뷰 중간에 글을 써 내려갈 때 “일제강점기에 글을 배워 한글보다 일본글이 수월하다”며 한자로 대신했다. 이따금 한국어를 쓸 때는 천천히 또박또박 쓰기도 했으나 어렵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김 박사는 요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8월 말이면 책이 완성된다는 그는 “젊은이들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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