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서기 392년 고구려 고국양왕(18대)이 왕위에 오른 8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담덕(談德)이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광개토대왕이었다. 18세에 왕위에 오른 그는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정하고 중국 오호 십육국의 하나인 후연(後燕)을 치고 그때부터 우리의 땅 옛 고조선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여 되돌려 놓았다.

410년 다시 동부여를 정벌하자 미구루 등 주변의 여러 소국들이 스스로 신하를 칭하며 항복해 왔다. 광개토대왕은 생애 21년 동안 64곳의 성과 1400여 마을을 점령하는 전과를 기록했다.

그가 죽고 맏아들 장수왕이 그 뒤를 물려 받았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만주 집안현 통구에 광개토대왕릉과 비를 세웠다. 그곳은 당시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대무신왕에서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역사와 비석의 건립 경위이고, 2부는 비문의 핵심인 광개토대왕 생전의 업적이다. 3부는 능을 지키는 관리자의 규정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 국내성에서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겼다. 그는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주로 북진정책을 썼던 것과는 달리 남진정책에 주력했다. 436년 중국의 북위(北魏)가 북연을 공격했다.

북연의 왕 풍홍이 신하 양이를 고구려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 두 장군에게 군사 3만을 출병시켜 화륭성에서 북위 장군 곽생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신라와 고구려 국경에서 신라가 고구려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화가 난 장수왕은 즉시 신라를 공격하여 단번에 사과를 받아내었다. 장수왕은 잠시 휴전을 하는 듯했으나 그때부터 숙원 사업인 남진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동해안을 내달려 실직주(강원 삼척)까지 점령을 한 뒤 다시 백제를 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계획을 알아차린 백제의 개로왕은 신라에 사절을 보내고 중국의 송나라와 북조에도 도움을 청했다. 또 그는 중국 후위의 왕 효문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걸병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 소문이 장수왕의 귀에 들어갔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의 신분을 위장하여 망명자로 속여 백제로 보냈다. 바둑을 잘 두는 도림은 개로왕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을 했다.

개로왕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도림은 그를 현혹시켜 사치에 빠지게 만들었다. 궁궐을 새로 수리하고 강을 따라 아름다운 누각을 짓고 역대 왕들의 묘도 새로 단장시켰다. 갑자기 수많은 공사를 일으키자 나라에는 돈이 마르고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지고 있었다.

때를 기다린 고구려 장수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의 목을 베었다. 싸움에서 대패한 백제는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수도를 웅진(충남 공주)으로 옮겼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불안을 느낀 신라와 백제가 군사 동맹을 맺자 장수왕은 481년에 군사를 출병하여 미질부성(경북 흥해)까지 진출했다.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동쪽은 북간도 훈춘, 북쪽은 개원, 남쪽은 아산만과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차지하여 중국의 여러 세력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웅을 겨루며 위협했다. 장수왕은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남한강 유역에 비를 세웠다.

그 비가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1979년에 발굴된 중원 고구려비였다. 중원 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주도권 장악을 의미하는 척경비이다. 한반도 남쪽에는 중원 고구려비가 지난날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발하며 서 있고 중국에는 광개토대왕비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중국대륙을 호령하듯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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