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서울 모 외국인 학교에 근무하는 대학시절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 스포츠 페스티벌 여자축구 경기에 심판을 맡고 기초적인 기술도 지도할 수 있는 축구전문가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수소문 끝에 대한축구협회 1급 심판자격증을 갖고 있고 영어도 할 수 있는 이를 찾아 친구 학교에 연결시켜 주었다.

스포츠 페스티벌을 마친 후 친구는 “정말 좋은 지도자를 소개시켜줘 고마웠다. 학생들은 물론 교장님도 아주 흡족해 하셨다”고 고마움을 표하고 간단한 선물도 보내왔다. 8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국내서는 중·고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축구를 지도하는 학교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 같은 외국인 학교의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교육시스템이었다. 만약 우리 중고등학생에게 여자축구를 체육시간에 교과과정으로 정식 가르친다면 아마도 학부모들이 “여학생들에게 남자들이 하는 거친 종목인 축구를 가르쳐서 어디다 써 먹을 것이냐”며 학교 당국에 거칠게 항의했을 법하다.

여자축구가 남자축구와 같이 체력, 지구력 등 운동효과 면에서 탁월하고 단결력, 적극성 등의 심성을 키울 수 있는 종목의 특장점을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형성돼 있지 않았으니 부정적인 여론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여자축구 대표팀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것은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였다. 당시 정부 체육관계자들은 여자축구의 아시안게임 파견문제를 놓고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보내느냐, 마느냐’로 갑론을박을 벌이던 중 당시 축구담당 기자였던 필자가 정부의 부정적 분위기와 여자축구의 대표팀 구성 당위성에 대한 기사를 내보낸 뒤에야 모 고위 체육당국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 와 “일부러 여자축구를 아시안게임에 보내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종목의 가능성 등을 여러 가지 면에서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며 고민 끝에 출전시키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여자축구는 첫 국제대회인 북경아시안게임에서 예상했던 대로 대패하고 예선탈락하는 쓰라린 첫 경험을 맛보았다.

최근 20세이하 세계여자축구선수권대회(U-20 여자축구월드컵)에서 사상 처음으로 3위를 차지한 여자축구를 보면서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에서 남자축구가 4강신화를 이룬 뒤 여자축구가 처음으로 세계 4강에 오르자 신문, 방송 등으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예선에서 전적조차 잘 취급하지 않았던 주요 언론들은 8강에서 멕시코를 꺾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마치 결승은 물론 우승까지 넘볼 수 있는 전력이라며 본격적으로 띄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자축구의 힘은 4강 이상을 뻗어나가지 못했다. 세계의 벽이 두텁고 견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등록선수가 1천여 명에 불과한 여자축구의 열악한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이번 월드컵 4강진출 자체만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쾌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변변한 실업팀 하나 없고 대학팀으로 연명하는 국내 여자축구가 세계 최고 무대인 월드컵에서 이 같은 성적을 올리리라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이번 여자축구의 월드컵 4강진출을 지켜보면서 성급하게 결과를 바라며 좋아하고 기뻐하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큰 목표를 갖고 기초적인 여건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녁에 날아오른다”는 명언이 생각났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아침부터 낮까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그 즉시 관찰해선 모든 걸 제대로 알기 어렵고 일이 끝난 황혼녁에 가서야 지혜로운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얘기로 이제 여자축구는 황혼녁을 위한 첫 날개짓을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의 지혜를 갖고 시간과 거리를 두고 본격적인 관심과 애정을 갖고 더욱 경쟁력있는 종목으로 육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자축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