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미국 나들이를 했다. 주마간산격으로 스쳐 지나간 듯한 10일간의 여정이었다. 기자 시절 여러 번 미국을 다녀 보았지만 이번 미국행은 각별했다. 아내와 고등학생 아들을 대동하고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나가 있는 큰 아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작 중요했던 것은 미국의 스포츠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자연스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남아공월드컵 결승 토너먼트가 한창 진행됐던 이달 초. 방문지였던 LA시의 대부분 레스토랑은 ESPN의 월드컵 생중계 방송을 틀어놓았다. 월드컵 우승팀 스페인 경기가 큰 관심을 모았다. LA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주 지역은 스페인어를 쓰는 히스패닉계가 많은 인구분포를 보이는 지역이어서인지 스페인 경기는 단연 인기를 끌었다.

남아공과의 시차로 인해 주로 낮시간에 열린 8강전 파라과이전, 4강전 독일전에서 스페인이 골을 터뜨리면 레스토랑 등 거리 곳곳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히스패닉계 사람들이 모국이나 다름없는 스페인을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이었다. 월드컵의 영향 탓인지 LA 시내 공원에서는 축구를 하는 동호인 팀, 유소년 팀들의 선수들이 많이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축구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곤 축구를 대하는 미국인들의 스포츠 정서가 이제 완전히 달라진 줄 알았다. 예전에는 미국축구 대표팀이 국제경기를 해도 상대팀을 응원하는 팀이 더 많았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로 미국은 축구에 관한한 냉소적이고 혐오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미국 스포츠의 실상을 아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의 주요 방송사와 신문 등 매스 미디어의 최대 관심은 정작 월드컵이 아니었다. NBA 클리블랜드에서 자유계약선수가 된 최고 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어느 팀으로 이적하느냐의 여부가 월드컵을 제치고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부각됐다. 언론들은 속보를 내보내고 르브론 제임스 에이전트의 멘트, NBA 팀 관계자들의 분석 등을 자세하게 곁들이며 기사경쟁을 뜨겁게 펼쳤다.

남아공월드컵은 르브론 제임스 소식에 밀려 ESPN이 생중계로 내보내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르브론 제임스의 마이애미 히트 입단이 결정된 순간, 미국 최고의 전국지 ‘USA 투데이’는 1면 톱 기사로 입단 소식을 내보냈으며 다른 신문들과 방송들도 톱 뉴스와 주요 뉴스로 다루었다. 남아공월드컵은 스포츠면에 르브론 제임스 관련 기사보다 훨씬 작은 크기로 내보냈다.

축구가 미국의 주류스포츠로 여전히 자리잡지 못하고 월드컵이 NBA의 특정 스타보다 관심을 못 끄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국은 아직 축구를 주요 스포츠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축구는 유럽형 스포츠로 미국의 문화적 우월감을 과시하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던 전 NFL 버팔로 빌 쿼터백 출신 잭 켐프가 “풋볼은 민주적 자본주의이고 축구는 유럽식 사회주의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구분하기 바랍니다”라고 한 말이 새삼 떠올랐다.

캘리포니아 지역은 히스패닉계가 많아 축구가 성행하고 축구에 대한 관심도도 높지만 미국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축구가 변방의 종목인 것은 이러한 반정서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 정치 등에서 세계화를 앞장서 이끌고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가장 세계화된 종목인 축구를 주류 스포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땅을 벗어나 태평양 한가운데를 나는 귀국행 비행기에서 축구가 새삼 세계화된 스포츠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국적기인 모 항공사는 안내 방송을 통해 “남아공월드컵에서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1-0으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음을 승객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라며 특별 서비스를 제공했다.

비행기로 이동하느라 역사적인 월드컵 결승 생중계를 보지 못한 대부분의 승객들을 위해서였다. 미국은 태평양 거리만큼이나 스포츠에서도 우리와는 아주 정서적으로 먼 나라임을 새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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