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1
창덕궁 인정전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1

한중연 ‘조선 군대 생활사’ 발간
단종 폐위 등 수차례 사화 발생
재건 5년 후 길한 날 택해 옮겨
궁궐 호위·숙위에 특히 신경 써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경복궁과 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은 모두 소실됐다. 광해군 2년(1610) 창덕궁은 재건됐고 법궁이 됐다. 하지만 광해군은 재건된 창덕궁에 가기를 꺼려했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긴 것은 낙성하고도 5년이 지난 후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행궁 생활 열악, 궁궐 중요성 강조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인정사정, 조선군대 생활사’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왜란을 피해 왕실 가족, 조정 대신과 함께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궁궐을 지켜야 하는 임금이 떠나자 백성들은 배신감을 느꼈고, 이들은 세 개의 궁궐을 불태웠다.

전쟁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자 선조는 1593년 10월 한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갈 궁궐이 없었다. 이에 정릉동(현 정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궁가를 행궁(뒤에 경운궁으로 개칭)으로 삼았다. 하지만 행궁 생활은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크게는 신변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호위 수직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정릉동 행궁의 문과 담장을 엄금하고 호위하는 것은 병조가 담당했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에 병조에서 군병을 그저 벌여 세워놓기만 하고 관리는 하지 않는다는 간언이 있었다. 병조의 담당자는 벌을 받았으나 원인은 행궁의 열악한 수직적 환경에 있었다. 공간이 협소하니 군사들이 머물 곳이 없었다. 결국 민가를 이용해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은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궁궐을 재건하고 행궁 생활을 마무리하는 게 시급했다. 선조 40년부터 복원이 시작된 창덕궁은 광해군 때 공사가 마무리됐다. 광해군은 창경궁 재건에도 힘썼다. 이 사이에 선조의 국장(國葬)이 있었고, 종묘에 신주를 부묘했다.

◆재건 5년 만에 창덕궁으로 옮겨

창덕궁 재건이 완공되자 여러 대신은 광해군에게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명나라 사신 접대 시에만 창덕궁을 사용했다. 창덕궁으로 옮긴 것은 재건 5년 후인 1615년 4월 2일이었다. 그 이유는 길한 날을 택해 창덕궁으로 옮기겠다는 마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광해군의 심정은 ‘광해군일기’에 담겨있다.

‘왕이 경운 행궁에 길한 기(氣)가 있다는 것을 들었고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內變: 나라에서 일어난 변고)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됐지만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이때 이르러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 요사스런 변괴가 많았으므로 곧 택일해 이어했다. 그런데 택일해 갈 때 귀신을 쫓는 술법을 많이 써서 서울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했다.’

실제로 창덕궁은 여러 차례 사화가 발생했던 곳이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에 의해 끌려 나갔던 곳도, 단종(노산군)이 세조에게 쫓겨났던 곳도 창덕궁이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 풍수나 술법에 많이 의지했던 광해군은 길한 날을 택했다.

◆비극 예견했나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은 급히 세자로 책봉됐다. 하지만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중국의 고명을 받아야 왕의 권위가 서던 세상이었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쫓아내고, 영창대군의 친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대비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이 같은 상황으로 다가올 창덕궁에서의 비극을 예견했던 걸까. 광해군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무엇보다 궁궐의 호위와 숙위에 신경을 썼다. 이것만으로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도성의 서쪽에 경덕궁(현 경희궁)과 인경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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