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빚을 졌으면 모든 노력을 다해서 제날짜에 갚아야 하는 것이 옳은 도리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사람끼리의 인간적인 믿음과 공동체의 가치를 유지시켜 주는 ‘신의성실의 원칙’이다.

필요할 때 빚을 얻어 써놓고 갚아야 할 때 힘들다고 ‘배를 째라’고 나오는 것은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신의와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불행히도 이런 일은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하다. 우리 사회의 신용기반이 위태로워질 지경이다.
 
그런 일이 공신력의 상징인 공공기관에 의해 벌어진다면 정말 위험하고 잘못된 신호를 그 존립기반인 사회에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바로 급속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의 확산이다.

놀랍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경기도 성남시장은 최근 성남시가 국토해양부와 토지주택공사에 갚아야 할 판교특별회계에서 전용한 부채 5200억 원에 대해 돌연히 ‘지불유예(Moratorium)’를 선언했다.

지난 12일, 그러니까 그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당선되고 나서 취임한 지 불과 12일째 되는 날이다. 날벼락 같은 발표였다.

성남시장의 느닷없는 모라토리움 선언에 국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나. 지자체(地自體)들이 경쟁적으로 호화청사를 짓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선심행정, 전시행정에 흥청망청 예산을 써 대더니 끝내는 거덜이 나기 시작하는가.

성남시도 그 말썽 많던 3200억 원짜리 새 청사를 짓고 따가운 눈총과 부러움 속에서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잘 나가는 줄만 알았는데 그 호화청사 안에서 발표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라토리움 선언을 했다.

정말 충격이었다. 우리는 IMF의 구제 금융으로 겨우 극복은 할 수 있었지만 고통스런 국가 부도 위기를 겪은 나라다. 먼 나라에서 그런 얘기가 들려와도 경기(驚氣)를 할 것 같은데 한 나라 한 지붕 밑에 사는 성남시장은 너무 태연하고 쉽게 모라토리움을 입에 담았다.

이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성남시장의 모라토리움(Moratorium) 선언이 민선 5기에 이르면서 부채가 누적된 지방정부들의 또 다른 모라토리움이나 줄도산 선언을 촉발시키지 않을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장이 너무 컸다. 그는 사태의 파문이 커지자 ‘우리는 디폴트(Default)를 선언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지불능력도 있고 지불의사도 있다. 일시적 자금 경색이다’라고 했다. 뒤늦게라도 사태를 바로 잡아주어 다행이지만 사정이 그런 것이라면 왜 사전에 채권자인 중앙정부나 토지주택공사(LH)와 진지하게 협의하고 해결할 생각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불쑥 일방적인 선언으로 재임기간 내내 원활하게 소통하고 상부상조해야 할 중앙정부나 공공기관과 껄끄러운 관계를 자초했는지 궁금하다. 일부의 관측대로 정당이 다른 전임자의 과실을 드러내 보이려는 파당적 의도와 정략이 있는 것이었나.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게 그렇다면 정당이 후보를 공천하는 우리 지자체 선거 제도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출신 정당이 같든지 다르든지 후임자는 선임자의 자산만 승계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의 참여 속에 지방의회가 동의하고 의결했을 부채까지도 다 끌어 안아야 하는 것은 상식이며 당연한 일 아닌가. 이렇게 보면 일개 지방정부의 수장으로서 그의 처신은 너무 가벼웠던 것 같다.

또 모라토리움이라는 중대 선언을 할 때는 의회와도 상의하고 주민의 의견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왜 그리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그 독단 역시 작은 과실이 아닐 것 같다.

오늘의 유능하고 바람직한 목민관(牧民官)은 빚도 잘 얻어 와야 하지만 갖다 쓴 빚을 신용을 지켜 갚기도 잘 해야 한다. 투자든 빚이든 약속을 안 지키면 누가 뭘 믿고 돈을 주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성남시장은 이번 사태에 대해 겸허하게 성찰하고 몸을 낮추어 수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시(市)의 이미지와 시의 신용이 입을 타격을 우려하는 성남시민을 안심시키고 잠시라도 혼란에 빠졌을 시정(市政)을 안정화해야 할 것이다.

그는 판교특별회계를 허술하게 관리한 국토해양부를 질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성남시가 그 예산을 전용하기 위해 한때는 아쉬운 입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제 와서 그러는 것이 썩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국민은 성남시장의 언행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지방권력이 야당에 가있다 해서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대립각을 세우고 곤혹스럽게 하거나 주민이 놀라고 국민이 충격을 받을 소란을 반길 국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주기 바란다. 나라 안팎으로 지금이 어떤 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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