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공원을 갔다. 홍살문을 지나 ‘사육신 묘’ 안내판부터 보았다. 

“이곳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중략)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 

아니 ‘사육신(死六臣)묘’라더니 ‘사칠신(死七臣)묘’네. 뭔가 이상하다.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니 앞에는 의절사(義節詞), 좌우엔 육각(六角)의 사육신비와 신도비각이 있다. 

‘육각의 사육신비’부터 보았다. 여기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하위지·유성원이 각 한 각씩 6각으로 둘러져 있다. 육각의 윗부분엔 육각비를 세운 내역이 적혀 있다.

“성삼문·박팽년·유성원·이개·하위지는 집현전 학사로 유응부와 더불어 세종대왕의 높은 신망과 깊은 은총에 감명하며 장손 단종을 보익하라는 간곡하신 고명을 무른 후 세종·문종의 뒤를 이어 단종이 등극하시매 나이 아직 어리신지라 정성으로 임금을 돕고 섬기는 중에 (중략)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사육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지극한 형벌과 무참한 죽임을 당하여 버린 듯이 여기 누워 그 충성과 절개 천추만세에 으뜸 되리니 (중략) 단기 4287년 10월 서울특별시 건립” 

단기 4287년을 서기로 환산하니 1954년이다. 그런데 사육신묘 안내판에는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 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어 어느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    

사육신의 각비에는 사육신의 충절이 담긴 시가 새겨져 있다. 성삼문 각비에는 그 유명한 절의시가 적혀 있다.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1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박팽년의 시도 숙연하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 듯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아 가실 줄이 있으랴” 

이개의 시 또한 애잔하다.   

“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가
저 촛불 나와 같아서 속타는 줄 모르더라” 

유응부는 함길도 절제사 시절에 지은 한시(漢詩)가 적혀있다.

“장군이 도끼 휘둘러 변경 오랑캐 진압하니 
변방엔 흙먼지 가라앉고 사졸은 편히 잠자네 
오천 필 준마들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울고  
삼백 마리 날쌘 송골매가 누각 앞에 앉아 있네”

유응부는 충의가도 지었는데 ‘청구영언’에 전해진다.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진단 말가 
하물며 못 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하위지도 한시가 적혀 있다.

“남아의 득실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  
머리위에 밝은 달이 환히 비추는데   
도롱이를 건네주는 뜻이 있을 것이라  
강호에 비 내리면 즐겁게 서로 찾으리”

하위지가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가자 박팽년이 도롱이를 빌려주었다. 하위지는 단종 복위 뜻으로 알아채고 이 시를 지었다.

유성원의 시도 한시인데 해석이 어렵다. 그 대신 ‘충의가’를 소개한다.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더니
문전의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워라” 

흔히 단종복위 사건은 ‘사육신 사건’으로 불린다. 이는 남효온의 ‘육신전’ 덕분이고, 숙종과 정조가 ‘역사 바로잡기’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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