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정여립은 벼슬을 내놓고 전주로 낙향한 뒤 평소 꿈꾸어 왔던 민본사상과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대동계를 만들고 퇴계의 예안 향약과 율곡의 해주 향약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태인고현 향약을 만들었다.

정여립은 소년시절에 임꺽정의 난을 겪었다. ‘나라에는 훌륭한 정사가 없고 교화가 밝지 못해 재상들이 마구 탐욕을 부리고 수령들이 학대해서 살을 발라내고 뼈를 부러뜨리며 피와 땀을 모조리 빨아내는데 백성들은 손발을 놀리지도 못하고 호소할 데가 없었다.

굶주림과 추위가 닥쳐 조석 사이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처지여서 한순간이나마 모진 목숨을 연장하려고 도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임금의 정사가 잘못된 것이지 백성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측은하지 않은가.’ 실록에 적혀 있는 임꺽정의 난에 대한 글이다. 실록은 정사이다. 실록의 내용이 이 정도라면 당시 사회의 참혹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런 시절을 겪은 소년 여립은 비분강개하여 벌써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가 보았던 참혹한 현실은 진보적 개혁을 움트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율곡도 따져보면 진보적 개혁 이론가였다. 이이는 대사헌 대제학으로 임금 선조의 절대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었다.

그는 나라에 빈번이 출몰하는 도적떼와 농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봉기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수탈 때문이라고 서릿발 같은 현실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임금에게 선정을 베풀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벼슬아치들에게 핍박과 수탈만 받던 암울한 시절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포용하는 정여립을 어두운 현실을 구제할 영웅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여립은 진보적 개혁주의의 학문을 통합적으로 파악하고 과거, 현실, 미래를 유기적으로 생각했다. 뚜렷한 비전이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는 시절 그의 출현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꿈을 술잔에 담아 시간을 죽이고 있던 의혈 남아들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음력 보름이면 무려 6백여 명의 대동계원들이 줄을 이었다.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군사조련도 했다. 중앙 조정은 백성을 교화시키고 자경적 훈련이라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設)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강론했다. “천하는 모두의 천하이고 모든 이의 공유물이다. 왕위는 혈통으로 이어 갈 것이 아니고 왕재가 되는 인물에게 선양하여야 한다.” 당시 어려운 사회 여건상 진보적 정치 철학은 왕권을 뒤집는 발칙한 발상이었다.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다.

선현여능(選賢與能)이란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지만 조선의 군왕은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자만이 추대되었다. 정여립은 지도자의 선출은 민의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화주의를 꿈꾸었다. 왕권 세습을 부정하는 그의 사상은 이미 성리학의 변화를 이해하는 유가의 실학파들이 누구나 공공연히 논하는 학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잘못하여 덕을 잃은 군주는 필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과도 맥을 같이 했다.

정여립은 진정으로 인권주의와 공화주의를 제창한 선각자인 동시에 시대를 앞선 사상가였다. 일부 학자들이 가장 이상적인 붕당정치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선조의 치세에 정여립과 같은 사상가의 출현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여립의 공화주의는 당시 의회주의가 꽃핀 영국에서 올리브 크롬웰이 외친 공화주의보다 5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크롬웰이 성공한 공화주의자라면 시대를 잘못 만난 정여립의 공화주의는 실패한 것인가? 정치적인 공작으로 역적이라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는 했으나 정여립이 외친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의 위대한 사상을 발굴하여 조명하는 일은 의식이 바른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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