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서울 심포니오케스트라 대표

지난 주말 미국 백악관 브리핑룸(기자실)의 헬렌 토머스 기자가 자신의 말 실수로 68년간 천직으로 여겨온 기자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아직까지 현역에서 활동 중이라는 사실에 놀라웠고, 평생을 ‘말과 글’을 다루며 살아온 그가 구설수로 은퇴했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필자가 10여 년 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시절 백악관과 대통령 선거 유세 현장에서 만났던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여장부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노쇠한 흔적이 역력해서 조만간 은퇴하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아흔을 눈앞에 둔 오늘날까지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게 존경스럽기조차 하다. 미국식 나이로 89세이지 사실 1920년 8월 4일생인 걸 감안하면 그는 한국나이로는 이미 아흔인 셈이다.

레바논 이민 2세인 토머스는 웨인주립대를 졸업하고 1942년 워싱턴 데일리뉴스의 주급 17.5달러짜리 카피걸로 언론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외신부를 거쳐 사회부에서 경험을 쌓은 후 1961년(묘하게도 오바마 대통령이 태어난 해이고 그와 오바마는 생일이 같다) 마침내 모든 기자들의 선망의 출입처인 백악관 담당기자로 옮겼다. 그는 이후 지금까지 49년 동안 백악관에서 무려 10명의 미국 대통령을 취재했다. 그는 이곳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깊이 있는 해설기사로 명성을 쌓기 시작, 마침내 브리핑의 맨 첫 질문권과 클로징멘트를 날릴 수 있는 거장이 되었다. 그는 브리핑룸 맨 앞줄에 동판으로 이름이 새겨진 지정석을 갖는 영예도 누렸고, 지난해 8월 생일 때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브리핑룸으로 컵케이크를 가져와 축하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반감을 가졌던 이스라엘에 대한 과격한 발언이 문제가 돼 화려한 은퇴식도 없이 짐을 싸야 했다.

언론인으로서 연조가 긴 만큼 그에 얽힌 일화는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그 중의 몇 가지를 보면 언론과 권력, 그리고 남성중심의 미국 지식인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질긴 신경전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취임 초부터 자신의 반 이슬람정책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토마스를 혼내 줄 궁리를 하던 부시 대통령은 2003년 브리핑룸의 관례를 깼다. 최고참 출입기자인 토마스에게 늘 줘오던 첫 질문권을 다른 기자에게 돌린 것이다. 회견을 끝낼 때도 먼저 “땡큐”라고 선수를 쳤다. 역시 토마스가 “땡큐,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인사하는 것으로 회견을 끝내는 관행을 끝내버린 것이다. 토머스를 멋지게 물 먹인 부시는 이후 내내 토머스에게 아예 질문권을 주지 않다가 2006년에야 질문 기회를 줬다. 토머스는 웃으면서 “후회할 텐데요”라고 하고는 부시를 몰아붙였다. “이라크를 침공한 대통령의 결정은 수많은 미국인과 이라크인의 희생을 낳았습니다. 전쟁을 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TV로 회견을 시청한 시청자들은 토머스에게 수천 송이의 장미를 보내 격려했다. 재임 내내 악연을 맺었던 부시도 퇴임 전 중견기자클럽 만찬에선 토머스의 손을 잡고 ‘이별의 노래’를 부른 뒤 그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악연을 마무리했다.

비단 부시뿐 아니라 그는 10명의 대통령에게 가장 곤혹스런 질문자였다. 부시 대통령 시절 토머스는 이라크 침공에 노골적으로 반대해 애리 플라이셔 당시 백악관 대변인은 그를 축출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10명의 대통령 누구도 언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다면 기자가 되지 말라.”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이란 없다.” “대통령과 언론은 항상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이 언제나 깨어 있도록 하는 게 언론이기 때문이다.” 등의 명언을 남겼다.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를 찍었다고 밝히기도 했던 그는 “오바마 대통령과의 허니문은 하루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면서 “이것이 언론의 속성 아니겠느냐”고 엄정중립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2000년 자서전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의 한국판 서문에서 “진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고 말했다. 이번 지방선거를 치르며 다시 위기에 처한 한국언론이 되새겨야 할 경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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