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 임금으로 명종의 조카뻘이었다. 선조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왕의 자질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스승들을 모시고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시로 여는 경연장에는 실력 있는 관료들이 참석을 하였는데 중앙 조정에 올라와 있는 젊은 정여립도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정여립은 참석자들 중에서 단연 뛰어나 어떤 학문을 논하든 막힘이 없고 달변으로 논리가 정연했다.

군신관계는 엄연했으나 선조는 정여립의 학문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서 자연히 밀리게 된 선조는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율곡 이이는 정여립을 두고 “임금 앞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할 말을 다하는 인물이다. 그는 재주가 많은 천재다”라고 칭찬을 할 정도였다.

즉위 초부터 정여립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진 선조는 군주로서 위엄을 확실히 갖추게 된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선조는 정여립이 스승인 이이를 비판했다고 하여 면전에서 심한 모욕을 주었다. 정여립은 학문적 이치가 다른 점을 지적했을 뿐이었다. 반대 세력인 서인들은 왕이 그를 미워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헐뜯기 시작했다.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한 정여립은 대동사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는 변덕이 심한 왕이었다. 그는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뜻과 부합되면 일단 받아들였다가 역풍을 만나면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그래서 귀양을 간 신하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각종 유언비어로 민심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조정은 동인과 서인 세력으로 나뉘어져 상호간 증오를 바탕으로 전면전 양상이었다. 선조는 동인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 권력을 초조하게 의심하고 정치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일어난 사건이 정여립의 역모사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역모사건은 분명히 조작 날조된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여립이 자살했다는 것 외에 수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전라도의 반역 모의를 어떻게 천리 길이 넘는 황해도에서 먼저 알고 고변을 했는지 당시의 정보 매체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주동자 중에서 명백하게 증거가 드러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사건을 이용하여 선조가 요동치는 민심을 가라앉히고 왕권 확립을 과시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서인들을 이용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정여립 역모사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사회 변화에 대한 조정의 무의식과 내부 모순을 극복할 여력이 없는 임금의 무기력함이 빚어낸 정치적인 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선조시대에는 사회 전 분야의 개혁을 요구하는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배타적 성향이 강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기득권들은 민초들의 요구를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고 선조 또한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과 개혁 역량의 무지로 사회 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전라도 해안을 침입하여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왜적 천여 명을 정여립 수하의 대동계가 출병해 모조리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자 국가의 환란에 늦장을 부린 무기력한 조정을 비난하는 민심은 대동계로 쏠리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선조는 간과하지 않았다.

화근을 뿌리채 뽑아 버려야 했다. 조작된 역모 사건이 터지자 선조는 낙향해 있던 정철을 불러 올렸다. 선조는 그를 역모 사건의 수사 책임 자리인 위관(委官)직에 임명했다. 칼자루를 쥔 서인의 영수 정철은 피비린내 나는 조선의 사화 중 최대로 많은 천여 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기축사화의 막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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