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성행궁의 정문이며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뜻의 신풍이라는 이름이 붙은 신풍루.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큰 규모 자랑

[천지일보=박수란 기자] 화성행궁은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2007년 6월 8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된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됐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전란·휴양·능원참배 등으로 궁궐을 떠나 임시 거처를 하는 곳이다.

화성행궁은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정조 18년)~1796년(정조 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 축성 기간에 확대하여 최종 완성됐다.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 붙여 이곳을 13차례 참배했으며, 이 기간 중 화성행궁에서 머물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유숙하며 여러 가지 행사를 치렀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 앞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죽을 끓여 먹인 진휼 행사가 그 중 하나다.

 

 

▲ 화성행궁의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화성행궁은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던 궁이기도 하다. 또 수원부의 70세 이상 노인을 초청해 노인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이렇듯 화성행궁과 인연이 깊은 정조에 대해 역사학자 이이화 씨는 “잘못된 관습인 지역․신분차별을 개혁하고, 궁녀제도를 폐지하는 등 여성의 인권을 위해 애쓴 왕”이라며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받고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궁은 건립 당시에는 봉수당, 복내당, 유여택, 신풍루, 남북군영, 우화관, 득중정 등 600여 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낙남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설물은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인해 그 모습을 잃게 됐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됐고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됐다.

공개 이후 화성행궁에서는 수원화성운영재단이 마련한 상설 공연이 해마다 펼쳐지고 있다. 화성 행궁 산대희(山臺戱), 무예 24기 공연, 장용영 수위의식 등이 신풍루 앞 광장에서 선보인다.

‘화성 행궁 산대희’는 정조가 화성 축성을 기념해 연 낙성연(落成宴)을 되살린 것으로 궁중무용, 무동놀이, 전통 줄타기 공연을 펼친다.

‘무예 24기 공연’은 정조의 명으로 우리 전통 무예와 중국, 일본의 무예를 정리해 펴낸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가지 실전 무예로 장창, 본국검, 권법 등 지상무예와 마상월도, 마상쌍검 등 마상무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장용영 수위의식’은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수위의식과 군례를 관찰하는 행사로 60여 명이 출연해 정조, 별감, 장용대장, 기수, 포수, 궁수, 조총수 등의 배역을 맡아 진행한다.

 

 

 

 

▲ 정조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영전인 운한각. 정조 대왕의 초상화가 봉안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정조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영전인 운한각. 정조 대왕의 초상화가 봉안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한편 화성행궁 옆에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유덕을 길이 받들기 위해 그의 영전을 모신 화령전이 있다.

다행히도 화령전은 화성행궁과 달리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돼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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