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퉁소명인 오청룡씨가 퉁소를 불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퉁소명인 오청룡씨

“심금 울리는 악기는 오직 퉁소뿐”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지만
퉁소 알리겠다는 신념 하나로 버텨
노력·끈기로 한국 안에서 인정받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퉁소는 흙냄새가 담긴 우리 민족의 전통악기입니다.”

퉁소명인 오청룡(58)씨는 많은 사람이 퉁소를 중국 악기로만 오인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중국 전통 공연에서 퉁소를 사용하는 게 일상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오청룡씨는 조선족이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일평생을 살았지만, 그에게는 뜨거운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퉁소에 마음이 끌린 것도 민족성 때문이었다.

“우리 퉁소의 역사는 천년이 넘습니다. 저는 퉁소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한국에서 공연하고 있습니다.”

▲ 퉁소명인 오청룡씨의 공연 모습 (제공: 오청룡씨)

◆우리 관악기 퉁소의 역사

퉁소는 굵은 대나무를 잘라 만든 민족과 함께한 관악기이다. 전체 길이가 55㎝ 정도 되는 비교적 큰 악기로, 세로로 잡고 위에 뚫린 구멍에 입술을 대고 분다. 퉁소는 위아래가 관처럼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적으로 퉁소는 고구려 고분벽화인 안악 3호분에 있는 장적(長笛), 백제 금동대향로에 있는 퉁소의 일종인 척팔(尺八), 신라의 토우에 있는 퉁소를 부는 악인상 등 역사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퉁소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보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용됐던 관악기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퉁소는 향약은 물론 종묘제례악 등 당악에도 널리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퉁소는 소통과 화합, 축제의 생활문화 악기였다.

하지만 요즘은 퉁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음악 기관이었던 ‘장악원’은 1897년 ‘교방사’로 개칭됐고, 1907년에는 다시 ‘장악과’로 개칭됐다. 일제는 1911년 장악과를 ‘아악대’로 개칭하고, 1915년에는 ‘이왕직아악부’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때 퉁소가 제외됐다고 한다. 민중적인 악기인 퉁소를 일제가 곱게 보지 않았던 듯 보인다.

오늘날 퉁소 시나위나 산조 연주자는 얼마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퉁소는 무형문화재인 북청사자놀음에 얹혀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국내 사정과 달리 중국에서는 연변지역의 동포들을 중심으로 복원 노력과 연주활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밀강퉁소(밀강은 함경북도 이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두만강변 지역)’를 2007년 국가급 문화재로 지정해 육성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 퉁소음악이 국내에서는 소외되고, 중국에서 문화재로 등록된 셈이다.

▲ 오청룡씨가 퉁소를 들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퉁소, 소리만 들어도 가슴 울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씨는 늘 마음이 답답했다고 했다. 퉁소를 지켜야 할 조국에서 오히려 소외되고 있기 때문. 많은 이들에게 퉁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그가 퉁소를 지켜나가는 방법이었다. 그 외로운 싸움을 한국에서 해온 것 이었다.

어릴 적부터 퉁소를 잘 불었던 것은 아니다. 형을 보고 어깨 너머로 배운 단소를 더 잘 불었다. 그러다 그의 나이 45세 되던 해 ‘꽃노을 예술단’ 단장에게 “너는 단소를 하지 말고 퉁소를 불어라, 퉁소는 한국 전통악기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데, 그때부터 연습에 매진했고 월등한 실력을 갖추게 됐다.

“우리 민족의 흙냄새가 담긴 퉁소는 슬픔과 기쁨을 알리는 악기입니다. 울지 못해 마음에 쌓은 한(恨)을 이 악기의 울림을 통해 전하는 거죠. 심금을 울리는 악기는 오직 퉁소밖에 없습니다.”

한번은 통일부에서 주최한 이산가족 행사에 참여했다. 참석자들이 ‘타향살이’를 연주해 달라고 해서, 그 곡을 연주하는 데 할머니들이 통곡해서 울었고, 연주하는 오씨의 얼굴에도 눈물이 흥건했다고 했다.

퉁소를 통해 연주되는 ‘타향살이’ 곡에 담긴 슬픔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었다. “할머니들의 슬픔이 저에게도 전달돼 가슴이 너무 찢어졌습니다.”

▲ 꽃노을 예술단 단장과 오청룡씨(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인, 퉁소 소리 알아야”

조선족으로서 퉁소를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안양예술공원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죠. 그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서로를 챙기는데, 조선족인 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문화 차이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 서러움에 눈물도 흘렸지만, 퉁소를 알리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난 세월을 버텨왔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 안에서 퉁소 명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노력과 끈기가 한국 안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어디를 가던 퉁소를 불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퉁소 소리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퉁소는 대대로 이어져야 할 우리 민족의 전통 악기입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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