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구 인사동 마루 연파갤러리에서 차담을 나누는 광주 왕실도자기 신현철 명장. ⓒ천지일보(뉴스천지)

35년 다기(茶器) 만든 도예작가
독창적이면서 한국적인 멋 살려
차인(茶人)들, 작품 소장 ‘로망’
미국·일본·중국 박물관서 소장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찻사발을 일본에서 전시했을 때, 그걸 한번 만지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투박하면서도 미려한 멋. 수천도의 고열 속에 장인의 혼이 녹아들어가 영롱한 이슬로 흘러내린 듯한 모양의 찻사발은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도다완(井戶茶碗) 작품을 감상하던 일본인 여성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한국인에게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도예가의 기억은 생생했다. 일본 전시회에 가져갔던 찻사발을 보고 눈물까지 흘린 일본인들의 반응은 그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마루 연파갤러리에서 만난 광주 왕실도자기의 명장, 연파(蓮波) 신현철 선생. 35년을 한결같이 독창적인 다기(茶器)를 만드는 그는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도예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예작가다. 그의 작품은 많은 차인(茶人)들에게도 정평이 나 있다. 한 차 애호가는 신 선생의 다기를 소장하는 것이 많은 차인들의 ‘로망’이라고 귀띔한다.

그의 작품은 세계도 인정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국악원 등 국내 시설은 물론, 미국 샌프란시스코 자연사 박물관, 일본 지바현 가와무라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차와 도자기의 본고장인 중국도 마찬가지다. 산동성 쯔보시중국도자관, 서안법문사박물관, 사천성세계차유적박물관, 항주다엽박물관, 의흥자사호박물관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다관.

◆‘첫 인연’ 고려백자와 만나다

도자기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청년 시절부터 싹이 텄다.

“한번은 친구들하고 고미술 전시하는 데를 갔죠. 한 도자기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조선백자 잘 생겼다’ 그랬더니 어떤 어른이 뒤에서 호통을 치는 겁니다. ‘이런 무식한 놈들, 그게 왜 조선백자야, 고려백자지’. 호통을 치고는 백자접시를 내 입술에 툭하고 들이대는데, 그 느낌이 너무 편안하고 부드러웠죠.”

원래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던 그가 자신의 교수가 차를 맥주 컵에 따라 마시는 모습을 본 것도 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군대를 제대한 뒤 도예가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분청사기의 거장’ 윤광조 선생 아래서 배웠다. 3년간을 공부한 결과 윤 선생의 작품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에게 또 다른 한계를 느끼게 했다. “고민을 했죠. 선생님 곁에서 보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작품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보따리를 쌌죠. 독자적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죠.”

▲ 달항아리.

◆다기 창작의 선구자가 되다

신 선생은 기존의 것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 창의적인 디자인을 추구한다. 그의 인사동 갤러리에 진열된 작품만 봐도 예사롭지 않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전통다기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이 한국적인 것인가에 천착해 온 작가의 도예 혼이 찻그릇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신 선생의 찻그릇은 안팎에서 ‘우리 차문화를 이끌어온 동력’이라는 평가를 받아왔거니와, 그의 창작열이 고스란히 밴 연잎다기를 비롯해 무궁화다기, 참새다기와 찻사발, 가루차(抹茶) 나눔다기, 연꽃을 연지에 띄워 꽃도 보고 차도 마실 수 있는 연지화개다법 등 각양각색의 다기가 눈길을 잡아끈다. 한국의 새로운 다기 창작의 선구자인 셈이다.

“도자기에 입문하고 보니까, 찻그릇에 관심이 있었는데, 박물관에 옛 찻그릇 하나 보기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그릇의 정체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죠. 차를 가장 많이 하는 분이 스님인데, 바랑에서 차를 꺼내 한잔 하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상징인 연잎 디자인으로 찻그릇을 만드는 데 3년 걸렸죠. 하나를 이루고 나니, 우리 국화인 무궁화꽃도 만들었죠. 우리 다기라는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형태적으로는 너무 단순해 더 이상 더하고 뺄 것이 없어 보이는 게 지금의 다기지만 그의 손끝에서는 그런 인식의 틀을 깨는 새로운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연잎다기다.

지난 세월, 신현철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연잎다기의 탄생 배경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어차피 지금의 차 문화는 그 뿌리를 불교의 선(禪)문화에 두고 있는데, 스님들이 손쉽게 바랑에 넣어 다니며 차를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형태적으로는 연잎이나 연꽃 등 종교적 상징성을 가지며 바랑 속에 거추장스럽지 않게 들어갈 만큼 기능적으로 간편한 연잎다기를 만들게 됐습니다.”

▲ 다기세트.

◆돈오(頓悟)의 경지에 오르다

이렇듯 우리 다기에서 일본 때를 쏙 빼내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일본식으로 비판받았던 일자(一字)형 옆손잡이 대신 둥그런 뒷손잡이를 창안해 냈는가 하면 찻그릇에서 모든 의도를 뺀 채 오로지 잘 생긴 유방처럼 누구나 편하게 대하고, 얼른 집어들 욕심이 들게 만든 것들이라 처음 보아도 새록새록 피어나는 욕심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일궈온 그의 찻그릇을 두고 작가 정동주씨는 ‘가히 돈오(頓悟)의 경지’라고 말한다.

“뭔가를 잔뜩 집어넣고자 하는 욕심을 물리치고 오로지 무심만으로 빚은, 그래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찻그릇에 뭣이든 자신의 느낌을 담을 여백이 있는 찻그릇이 바로 신현철의 다기”라고 말했다.

그가 새 작품을 구상하고 작품으로 내놓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달 항아리를 만들어 달란 주문을 받고 3년 동안을 매일 달을 관찰하며 지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달을 보며 무작정 걷다가 너무 멀리 가서 아내에게 차로 데리러 오라고 연락하기도 했다. 그렇게 흐른 3년. 그가 본 달엔 모든 형상이 들어 있었다.

“달 속에 모든 선이 다 있어요. 어릴 때 보던 장독부터 작은 고추장 단지까지 다 달에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보면 달마대사 눈썹처럼 초승달이 크게 떠 있는데, 선 하나 그으면 사발이 됩니다. 농경문화 속에서 달을 보고 날짜를 계산한 것처럼, 그릇 속에도 달이 담겨 있습니다.”

▲ 다반(茶盤)과 참새다기.

◆작품 하나하나에 철학을 담다

신 선생은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만드는 것이 없다. 약간 찌그러진 모양의 찻그릇 두 개를 합치면 태극 문양이 그려진다. 찻그릇 받침 3개는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한다. 작품마다 음행오행(陰行五行)의 철학을 불어넣었다.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을 빚는다는 평가를 받아온 이유다.

실용성도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보기 좋아도 사용하기에 불편하면 외면 받는 법. 그의 다구는 손으로 쥐기에 딱 알맞은 크기다. 찻잔은 손가락 위치까지 표시해 넣기도 했다. 독창성과 실용성, 그리고 창의성. 그의 작품세계를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주 섬세한 소품 다기에서부터 투박하고 거친 작품, 그리고 대작까지 다양한 조형미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사용된 점토는 조합토와 산청토, 백토 그리고 불심이 강한 내화토 등이다. 유약은 주로 자연 유약인 식물성유와 황토유, 물토유, 천목유 등을 사용했다. 장작 가마를 이용한 온도 변화를 전통적 기법으로 최대한 살리기 위한 노력들이 작품마다 배여 있다.

▲ 신현철 명장이 다관(茶罐)에 물을 붓고 있다.

◆“우리 그릇 정체성 지켰다”

신 선생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마터는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 있다. 가장 정신을 집중할 때는 가마에 불을 땔 때라고 한다. 도자기를 굽는 불의 온도와 시간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춰야 하는데, 정신이 흐트러지면 순간의 실수로 작품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예를 향한 신 선생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르지만, 도예 시장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그가 인고의 시간을 거쳐 새 작품을 만들어 내놓으면 한두 점을 팔기가 무섭게 모방 작품이 순식간에 깔린다고 한다. 중국에선 신 선생의 작품을 모방한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 싼 값에 팔기도 한다.

하얀 한복차림의 긴 수염. 흡사 도인을 떠올리게 하는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 그릇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제가 했던 일이 어떻게 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그릇의 멋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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