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 이항복의 친필 편지. (제공: 소장자 박성수씨)

30세 한림 시절 후배 성균관 생원에게 보낸 것
‘모친 잃은 슬픔 탄식하여 안정도 못 해’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조선 중기의 명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 1618)이라면 낯설지만 ‘오성과 한음’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해 인간의 약점과 본성을 조명해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높은 가치를 가진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 백사 이항복의 효심이 드러나는 편지가 발견됐다.

고서 수장 박성수씨가 본지에 제보한 이 편지(크기 28X28㎝)는 이항복이 31세 한림시절 후배 성균관 생원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에는 모친상을 치른 백사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모친의 병환으로 걱정하는 후배를 위로하고 글귀가 담겨있어 효를 만행의 근본으로 실천한 조선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편지를 받은 장본인은 상촌(桑村) 신흠(申欽 1566∼1628)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사와 상촌은 10년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모두 율곡 이이의 제자로서 조정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존경받았다.

이항복은 9세에 부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모친 최씨로부터 엄격한 훈계와 가르침으로 성장했으나, 나이 16세에 최씨가 세상을 떠났다. 백사는 비뚤어져 나갔던 자신을 바르게 잡아주었던 모친에 대한 그리움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학문에 정진해 19세에 성균 진사,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고 24세에 알성 문과에 병과로 장원급제했다.

이항복은 병조판서 당시 선조를 호종했으며 청백리에 녹선 되고 서애(西厓) 유성룡과 함께 난국극복의 명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실록을 보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 직전 이를 강력히 반대, 죽음을 면하게 한 장본인으로 기록된다. 이항복은 종로구 필운동 현 배화여고 후정 필운대에 살았으며 이는 그의 아호 ‘필운(弼雲)’에서 비롯된 것이다.

▲ 백사 이항복 영정. (출처: 서울대학교 박물관)

편지를 고증한 역사연구가 이재준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은 “편지에는 쓴 사람의 인격이나 정신, 생활양식이 묻어난다”며 “백사의 수적(手蹟)은 매우 귀할 뿐 아니라 이번에 찾아진 간찰은 청백리로서 효행이 뛰어났던 백사의 인물 됨됨과 성균관 생원 등 교우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이 전 위원은 “겉표지에 신생원(申生員) 앞으로 보내는 글씨와 말미에 ‘丁 十二月 二十五日’ 이라는 간지가 보여 백사가 31세 한림(翰林)으로 있을 당시(선조 20년 1587AD 丁亥), 후배 성균 생원인 상촌(桑村) 심흠(申欽, 당시는 성균 생원. 조선 중기 한문학의 종정. 나중에 영의정)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 된다”고 말했다. 이 전위원은 특히 “백사는 젊은 나이에 이미 학문이 깊었던 상촌 신흠에 대한 경의와 정중함을 잃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특히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은 슬픔을 물가에 버려진 것에 비유해 스스로 탄식하며 안주하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고 덧붙였다.

편지를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신생원(申生員)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드립니다. 모친상을 치른 후 물가에 버려진 마음(孝思)으로 제 자신이 탄식하여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당상(堂上. 정 삼품의 벼슬)의 수운도 만호하시고 시약(侍藥)도 알지 못하오나 마땅히 어려움이 없기를 빕니다. 좋은 절기에 위로함이 용렬하고 구구함이 제 그릇됨 입니다. 복제(服弟.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춤)는 오늘에 있어 나가 위문하기가 어렵습니다. 친함도 굳은 약속이 함께 한 후에 항구 평안함이 있습니다. 곤란 한 일로 떠나기 어렵고 남동생 무리도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어제 오늘 흔들림이 많고 또 객지에 있음에 며칠이 될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어려워 이에 뜻을 이루었으나 정을 이루지 못하여 스스로 모멸스럽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용서함을 바랍니다. 오직 어머니를 지극히 생각하시는 효성으로 건강 해침이 없도록 순애(順愛)하시길 빕니다. 소례를 갖추지 못하오니 너그럽게 받아주소서-

정 십이월 이십오일 제(弟) 이항복 돈(頓. 머리를 조아림) - (이재준 전 위원 意譯)

▲ 겸재 정선이 그린 이항복이 살던 필운대 풍경. (출처: 간송 미술관)

서울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고 후정 큰 암반에 ‘필운대’(弼雲臺)란 각자가 있다. 필운대는 조선 중기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그림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는 경승이다.

필운대의 ‘필운(弼雲)’ 두 글자는 이항복의 아호. 그리고 중간에 있는 제명은 고종 10년(1889)에 월성 이유원이 지은 것이다. ‘필운대’라는 각자는 19세기의 글씨로 추정되고 있다. 우측에 있는 감동명(感動銘)은 가곡원류를 지은 한말의 문사 박효관 외 9명이 열기되어 있다. 이 각자로 백사 이항복이 살던 집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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