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기념관에 전시된 민주화를 위해 외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1960년 4월 19일, 진영숙 학생이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중학교 2학년인 어린 나이였지만, 그도 부정선거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4.19혁명. 피의 화요일이었지만, 그 끝은 학생들의 승리였다. 역사적인 그날이 있기까지의 과정은 어땠을까.

◆3.15 부정선거와 이승만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됐으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국민의 생활은 곤경에 빠지게 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해야 함에도 장기 집권에 몰두해 민의를 거스른 독재 정치가 지속되고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 국회의 간접선거에 의한 당선이 어렵게 되자, 직선제로 헌법을 바꿔 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다시 영구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는 내용으로 헌법을 고쳐 3대 대통령이 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0년 3월 15일, 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했다.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선거일을 2개월이나 앞당겼다.

하지만 조 후보가 미국에서 갑자기 사망해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시됐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켜 당시 85세인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하면 모든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공무원을 총동원해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기도 했다.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내무부 장관은 득표수를 줄여서 발표하도록 했다. 결국 이승만 963만표(85%), 이기붕 833만표(73%)로 당선자가 발표됐다.

▲ 4.19기념관에 전시된 민주화를 위한 외침.ⓒ천지일보(뉴스천지)

◆3.15 마산 의거

부정선거에 많은 국민은 분노했다. 마산 시민과 학생은 3월 15일 부정 선거를 폭로하고, 선거 무효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총을 쏘며 진압했다. 이에 10여명이 사망하고 87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자유당 정권은 공산당이 마산 시위를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다 시위 중 행방불명된 16세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다. 분노한 시민은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마산에서 2차 시위를 벌였다.

◆4.18 고려대 학생 시위와 피습

1960년 4월 18일에는 3000명의 고려대 학생이 “기성세대는 반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라며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자유·정의·진리 드높이자’라는 현수막을 들고 국회 앞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아 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학생들의 피습 사실이 다음 날 신문에 보도되자 분노한 고교생까지 전국적으로 시위에 가담하게 됐다.

▲ 4.19혁명에 참여한 초등학생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피의 화요일’ 4월 19일

학생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 독재정권은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서울시내 곳곳을 누볐다. 시위대는 10만명이 넘었고,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강경 대응에도 시위는 인천·수원·부산·광주 등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이승만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날 전국적으로 시위대와 경찰 등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결과 국무위원과 부통령이 사표를 냈고,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만을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유당 정권의 통치체제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천지일보(뉴스천지)

◆승리의 화요일 4월 25일

4월 25일부터 시위대는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승만 동상이 철거됐다.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계엄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지시했다. 국회는 ‘대통령의 즉각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 내각 책임제 개헌’ 등을 결의했다.

이후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고 말하고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자유당 정권도 무너지게 됐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4.19혁명은 자유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승리였다.

▲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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