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무진 ⓒ천지일보(뉴스천지)

◆전설과 역사가 맞닿은 그곳 ‘백령도’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대한민국 땅의 서쪽 끝이자 북쪽 끝에 있는 백령도. 북한 땅과 맞닿아 늘 긴장감이 흐르는 섬이다. 섬 중에서도 외딴 섬에 속하다보니 독특한 자연과 문화가 잘 보존돼 있다. 천혜의 비경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섬에는 얽힌 이야기도 많다.

인천을 떠나 대청도와 소청도에 잠시 들른 배가 4시간 만에 백령도에 다다른다. 푸른 하늘과 바다 중간 지점에 놓인 섬의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북녘 땅이 바로 보이지만, 바닷가 풍경은 여느 섬과 마찬가지로 평화롭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백령도(白翎島). 본래 황해도에 속했던 섬은 광복 이후 대청도, 소청도와 함께 38선 이남의 인근 옹진군에 편입되면서 경기도 옹진군으로 재편됐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편입됐다. 지금은 화동과 사곶 사이를 매립해 면적이 늘어나 국내에서는 8번째로 큰 섬이다. 지리적으로 서울보다 북한이나 중국과 가까운 백령도는 군사·문화적 요충지다. 특히 6·25전쟁 당시 군사 요충지로 주목받았던 탓에 휴전을 앞둔 전쟁 막바지에는 치열한 전투가 수시로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전쟁의 상흔의 남은 곳이지만 백령도는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섬이다.

1832년 최초의 내한 선교사 귀츨라프가 백령도를 찾았고, 1898년 설립된 중화동교회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로 백령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母敎會)다. 중화동교회를 방문했다면 입구 계단에 핀 옹진 백령도 연화리 무궁화나무를 놓치지 말자. 높이 6.3m, 수령 100년 안팎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궁화나무로 알려져 있다.

백령도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곳이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백령도를 통한 선교사 입국 루트를 개척하다 관군에게 잡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가 개척한 루트로 프랑스 선교사 17명이 입국하기도 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아 내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김대건 신부와 당시 선교사 6명을 성인품에 올렸다. 백령면 진촌리에 있는 백령성당에는 김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돼 있다.

▲ 꼬끼리바위 ⓒ천지일보(뉴스천지)

◆신들의 조각품, 두무진

백령도가 군사‧역사적으로만 중요한 공간은 아니다. 시간과 자연의 빚어낸 신비로움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백령도에서도 두무진(명승 제8호) 일대는 ‘신들의 조각품’이라고 추켜세울 정도로 절경을 자랑한다. 섬 주변에는 다양한 기암괴석들이 늘어섰는데 이 거대한 암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장군들이 서로 모여 회의를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기암괴석들이 무리 지은 장군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두무진(頭武津)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또한 서해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워 백령도 관광의 백미로 꼽힌다. 특히 두무진의 일몰은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며, 우리 민족의 통일과 진정한 평화를 염원해본다. 두무진은 황해도의 서쪽 끝인 장산곶과 불과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모래알이 작고 모래 사이 틈이 좁아 여느 해안과는 달리 단단한 바닥을 가진 사곶해안(천연기념물 제391호). 단단한 백사장 덕에 전 세계에서 단 두 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으로 유명한 이곳은 4㎞에 이르는 고운 모래사장과 완만한 수심으로 해수욕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남포리 콩돌해변(천연기념물 제392호)에서는 동글동글 작은 자갈들이 파도를 맞고 있다. ‘사그락 사그락’ 파도와 자갈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백령도 용기포 신항과 마주하고 있는 용기원산 전망대에 오르면 섬의 전경을 한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날이 좋으면 북한의 장산곶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건만 분단과 휴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비극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목숨을 잃은 천안함 46용사의 넋이 깃들어있기 때문인지 이곳의 애잔함이 더해진다.

▲ 심청각 진입로에 그려진 심청 벽화 ⓒ천지일보(뉴스천지)

◆장산곶과 백령도, 그 사이에 인당수가 있다

효녀 심청이 앞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供養米) 삼백 석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印塘水). 백령도와 북한 황해도 장산곶 사이의 바다를 인당수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이는 백령도에 효녀 심청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 ‘심청각’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령도와 대청도 중간에 있는 연봉바위는 용궁에 내려갔다 온 심청이가 연꽃에 싸여 물 위로 떠올랐던 곳이라고 한다. 소설이든 혹은 오래 전의 실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설화처럼 굳어진 것이든, 심청각에서 바라보는 인당수는 유난히 더 깊고 차가워 보인다.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친 효녀 심청. 사실 조금만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심청의 이야기는 ‘효(孝)’라는 메시지 외에도 어른들의 위선과 욕심, 종교인의 사기행각(스님), 뱃사람들의 인신공희 등 참으로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결국 한 소녀를 죽음으로 내민 슬픈 이야기가 함께 서려있다.

심청이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면,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행위가 단지 아버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청의 희생은 당시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불법을 당연한 듯 행했던 어른들과 그런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희생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인당수인가. 사람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곳이라면 응당 ‘사람 인(人)’자를 떠올리기 쉬운데, 심청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진 곳은 ‘도장 인(印)’을 쓴 인당수(印塘水)다. 이는 초자연적인 무엇 혹은 누군가와의 무언의 약속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양미 삼백 석에 눈을 뜨게 된다는 스님의 약속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거짓이었지만, 그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의 믿음이 결국 아버지의 눈을 뜨게 만든다는 복선은 아니었을까.

▲ 백령도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