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석등 ⓒ천지일보(뉴스천지)

<영주 부석사, 안동 병산서원 기행>
1300년 세월 지낸 부석사
오르막길 비스듬히 지은 건물
태백산맥 어우러져 절경 이뤄

청량함 가득 소수서원
恨 서린 죽계천 서원 끼고 돌아

건축의 모범답안, 병산서원 만대루
낙동강·병산절벽 병풍 만들어

[천지일보=김일녀 기자] 로랑 살로몽(Laurant Salomon) 프랑스 건축가협회장은 1990년대 말부터 한국을 찾기 시작해 방한할 때마다 유명 사찰이나 전통 한옥을 꼭 찾아다녔다고 한다. 지난 2008년 방한했을 때는 경북 영주 부석사와 안동 병산서원을 찾았다. 당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보면 볼수록 심오한 매력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게 한국 건축이예요. 그 자체가 자연이고 풍경이죠. 자연 속에서 지어졌으면서도 거부감 없이 자연과 하나 되는 정교한 구도(체계)를 가졌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쓴소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이런 ‘건축의 맥’을 정작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무량수전 곡선 닮은 태백산맥

1년에 적어도 한두 번은 부석사를 찾는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노랫말처럼,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무량수전을 등지고 안양루 옆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잔잔히 물결치듯 펼쳐진 태백산맥의 흐름을 누군가는 ‘엄마의 품’ 같다고 했고, 유홍준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무량수전의 앞마당’이라고 했다. 1000년도 훨씬 넘게 서로를 마주보는 동안 서로를 닮아버린 무량수전의 곡선과 태백산맥의 능선, 그 사이에 서 있는 순간만큼은 모난 내 모습도 둥글어지는 것 같다. 언제 어느 때 불쑥 찾아와도 변함없는 감동을 전해주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부석사는 1300년 된 고찰로 우리나라 10대 사찰 중 하나이자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절로 손꼽힌다. 중국에서 유학한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당나라에서 불도를 배우고 귀국해 화엄종을 펼치고자 세운 절이다.

매표소에서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오르막길 주변에는 사과밭과 인삼밭이 펼쳐져 있고, 길 양쪽으로는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다. 아직 이른 봄이라 하얀 사과꽃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일주문에서 부석사 가장 위쪽에 자리한 조사당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9단 석축으로 일정하게 분할돼 있어 하나의 석축에 올라설 때마다 그곳만의 풍경이 펼쳐진다. 아마도 입구부터 시작된 오르막을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 석축에 올라설 때마다 한숨을 돌리게 한 후,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게 하고자 한 건축가의 계산이 깔린 듯하다. 특히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위치한 범종각과 안양루, 무량수전은 일직선이 아니라 비스듬히 꺾여 있는데, 거기서 연출되는 시각적 효과는 여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색다른 풍경이다.

무량수전을 만나기 직전인 안양루 누각 아래 돌계단.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계단을 오를 수 없다. 힘들게 여기까지 오르막을 올라왔어도 속세에서 화엄의 세계로 들어서기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무량수전 앞에서 배흘림기둥과 팔작지붕을 한참 바라보았다. 건축학도가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전통 건축의 곡선 미(美)에 빠져버렸다. 거기서 동편으로 올라가면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부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관 중 하나다. 무량수전 팔작지붕의 곡선 자태는 물론, 부석사의 전체 윤곽과 저 멀리 펼쳐진 태백산맥의 흐름까지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 자신의 모든 작품에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던 현대 건축의 아버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직선은 인간의 것이지만 곡선은 신의 것이다”

▲ 소수서원 강학당 ⓒ천지일보(뉴스천지)

하버드대학보다 90여년 앞선 소수서원

부석사에 이어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소수서원의 시초는 백운동 서원이다. 1542년 풍기 군수로 부임해온 주세붕 선생이 회헌 안향의 높은 학문과 그 뜻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 1550년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친필로 쓴 현판을 비롯해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특히 노비와 토지에 대한 면세·면역 특권을 허락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 됐다. 하버드대학교보다 9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입구부터가 웅장하다. 울창한 소나무 숲 그늘로 들어서면 속세와 단절되는 듯한 근엄함이 몰려오고, 소백산에서 발원해 서원을 끼고 흐르는 죽계천은 솔숲의 푸름을 받아 청량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죽계천은 한이 서린 곳이다.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하게 되면서 순흥부는 불타 폐허가 되고 무고한 백성 500여 명이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시신이 버려진 죽계천은 피로 물들었고 20여 리나 흘러가 ‘피끝마을(안정면 동촌리)’에서야 희석이 됐다고 한다. 죽계천에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빨간색으로 칠해져 눈에 띈다. 당시 억울하게 죽은 백성의 혼을 달래기 위해, 또 유생들이 백성을 공경하는 자가 되라는 뜻에서 주세붕 선생이 새긴 것이라고 한다.

서원 안쪽으로 들어서면 오늘날 학교의 교실과 같은 역할을 했던 강학당이 나온다. 부석사와 같은 배흘림기둥에다 사방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마루가 있다. 이곳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유생들이 공부하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선생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서 나오지 않고 이 마루까지 뒷걸음쳐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물러날 ‘퇴(退)’자를 써서 툇마루라고 한다.

▲ 병산서원 만대루 ⓒ천지일보(뉴스천지)

건축의 모범 답안 ‘만대루’

안동 하회마을에 잠시 들렀다가 10여 리 떨어진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병산서원은 고려 말 서애 류성룡 선생이 후진양성의 도량으로 삼은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선 학회와 학술 토론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자 군무를 총괄하는 도제찰사였던 서애 류성룡은 이순신·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고,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해 ‘하늘이 내린 재상’이라고 불렸다.

서애 류성룡의 자취가 남아 있는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건축가들에게 제1의 답사지로 꼽힌다. 특히 병산서원의 상징인 만대루는 ‘건축의 모범 답안’이라 불린다. 두 팔로도 다 안을 수 없는 나무 기둥 위에 세워진 만대루는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 부재를 짜 맞춰 지어진 앞면 7칸, 옆면 2칸의 누각이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거나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면 볼수록 깊은 매력이 느껴진다. 만대루의 앞면 7칸은 서원 앞에 펼쳐진 낙동강과 백사장 그리고 높게 솟아 있는 병산절벽을 7폭의 절경이 담긴 병풍으로 만들어 낸다. 동시에 깎아지를 듯 솟은 병산절벽이 주는 압박감을 완충해 주는 역할도 한다. 건축의 맛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날마다 이런 곳에서 글을 읽고 시를 지었을 유생들은 호연지기가 저절로 길러지지 않았을까. 또 서애 류성룡의 학자다운 면모는 바로 이곳의 자연과 건축물이 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모든 질문의 답을 ‘만대루’라고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혼자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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