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 있는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의 탄생가. ⓒ천지일보(뉴스천지)

원불교 제2대 종법사 탄생지·구도지 위치
달마산 앞 봉황 춤추는 땅에서 태어나
교도들, ‘평화의 성자’로 추앙하고 경배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정부의 사드배치 후보지 결정 발표로 화들짝 놀란 원불교. 그동안 정부 시책에 이렇다 할 반대를 하지 않았던 원불교계가 이번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연일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드배치 후보지로 발표된 곳은 사드배치 제3부지로 경북 성주군 초전면 달마산 인근으로 이곳에는 원불교 2대 종법사이며, 종단 내에서 평화의 성자로 추앙을 받고 있는 정산(鼎山) 송규(宋奎, 1900~1962) 종사의 탄생지와 구도지가 있다.

1월 중순 핫 플레이스가 된 성주성지를 찾았다. 성주성지 인근에는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원불교의 의지를 담은 현수막이 성주성지가 처한 현 상황을 보여주는 듯 했다.

▲ 정산종사가 탄생한 방에 정산, 주산종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정산종사 탄생가

정산종사의 고향인 성주는 성산가야의 옛 터전으로 경상북도 서남쪽 끝에 있다. 성주와 원불교의 인연은 소태산 대종사의 법통을 계승하여 원불교의 발전의 터전을 확립했던 정산종사로부터 비롯된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 있는 탄생가는 정산종사가 부친 송벽조 정사와 모친 이운외 정사의 장남으로 1900년에 태어난 집이다. 주산 송도성 종사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정산종사는 9세까지 이 집에서 자랐다. 정산종사가 탄생한 방에는 정산, 주산종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어 순례객들이 참배를 올리고 있다.

▲ 탄생가 초가집 옆에는 1900년부터 있었던 우물이 보존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탄생가에는 돌담, 우물, 느티나무들이 그대로 있어 정산종사 어려서 뛰어 놀았으리라 생각되는 그날의 정취가 그대로 배어 있는 느낌을 준다. 정문 입구에는 삼동윤리비가 서있다.

마을 뒷산은 달마산으로 장삼을 걸친 달마대사가 앉아있는 것 같은 큰 바위가 정상에 솟아 있어 바위 이름도 달마 바위며 산 이름도 이에 연유되어 붙여진 불연(佛緣)의 고장이다. 정산종사가 이사해 성장한 소야 성장지와 도를 얻은 ‘소성구도지’ 비가 세워져 있는 박실마을은 1㎞쯤 떨어져 있다. 박실마을에서 조금 나오면 연봉, 봉무 마을이 있는데, 이는 중국 순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시절 사양의 덕을 노래 하니 ‘봉황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라는 옛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성동 마을 뒤에는 달뫼가 변음되어 불리워지는 달마산, 형제봉, 연봉, 허봉 등이 있다. 마을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춤추는 땅이라고 전한다.

◆소야성장지

정산종사는 9세까지 탄생가에서 성장했고, 그 후 200미터 떨어진 소야로 이사했다. 정산종사 이때부터 도를 구하기 위한 단계에 들어선다. 정산종사는 11세경부터 사서를 공부했는데, 한 나라를 바로세우는 큰 인물이 되고자 했던 생각은 곧 바뀌게 된다. 천하창생을 널리 구제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건설하리라는 포부였다. 이후 12세경에 ‘지수만물무피차 천강조민유비존 유연즉시일시남 문무겸전기불난(地輸萬物無彼此 天降兆民有卑尊 劉淵卽是一時男 文武兼全豈不難)’이라는 시를 지었다. 해석하면 ‘지상에 실린 만물 너와 내가 없었건만 하늘이 내린 백성 높낮음이 있어졌네. 유연은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나이나 문무를 겸전하기가 어찌 어렵지 아니하랴’다.

정산종사는 13세에 성주군 금수면 광산동에 거주하는 여씨가의 청운과 결혼을 했다. 정산종사 이즈음해서 성숙된 구도열정이 생활의 축이 된다. 즉 본격적인 구도가 시작된 것이다. 결혼 후 소야에서 박실로 이사를 하고 소야 성장지는 지금도 빈터로 남아있다. 정산종사 탄생가 바로 아래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 정산종사의 구도지였던 박실마을에 세워진 대각전과 원불당. ⓒ천지일보(뉴스천지)

 

◆구도의 절정 ‘박실구도지’

정산종사 13세 되시던 해 봄에 여청운과 결혼을 하게 되자 부친 송벽조는 새로 집을 지어 박실로 이사했다. 소야 성장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초전면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정산종사는 비록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은 했지만 가정생활은 거의 관심이 없었고 다만 구도에 대한 열정만 더해간 것으로 구전됐다. 박실마을 집 뒷뜰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에 정안수를 떠놓고 매일 기도했다. 현재 이곳에는 거북바위가 아직도 정산종사의 구도일념을 대변하고 있고, 원불교 중앙문화원에서 박실 구도지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각전과 원불당 등이 건립됐다.

▲ 대각전에 모셔진 정산종사의 초상. ⓒ천지일보(뉴스천지)

◆정산 종법사는?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서 다른 구인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에 적극 노력했다. 또한, 교리 제정에 기여한 공로로 인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그를 ‘우리 회상의 법모’라고 까지 칭찬했다. 이후 정산종사는 익산총부와 영산성지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했고, 1943년(원기 28년)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종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됐다.

일제말기의 가혹한 탄압과 8·15의 혼란, 6·25의 수난 등을 극복하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성업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8·15 광복 이후에 교단의 명칭을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로 바꿨다. 정산종사는 ‘원각가’ ‘불법연구회 창건사’ ‘건국론’ 등을 비롯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각가는 당시 교도들의 신앙·수행심 고취에 큰 역할을 했고, 불법연구회창건사는 원불교 교사의 기본이 됐다. 건국론은 현재까지도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법어’가 1972년(원기 57년)에 발간돼 원불교 교서 중 하나가 됐는데, ‘대종경’과 더불어 교도들에게 읽히고 있다. 정산종사는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을 직접 집필해 소태산 대종사를 후천개벽시대의 주세불로, 원불교를 주세종교로 천명했다.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진리, 인류는 한 가족이라고 말했다.
 

▲ 성주성지가 자리한 성주군 초전면 달마산 자락의 박실마을.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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