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충북 제천에 위치한 배론성지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주교인들의 피난처 ‘배론성지’

배 밑바닥 닮아 ‘배론’으로 명명
황사영 토굴과 배론신학교 위치

황사영 알렉시오
5평짜리 토굴서 8개월간 은신
발각돼 젊은 나이에 능지처참

최양업 신부
매년 2800㎞ 걸어 교우촌 방문
열정으로 선교하다 과로로 병사

[천지일보=박완희 기자] 1801년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천주교 신앙은 대역죄에 해당했다. 황사영(1775~1801) 알렉시오는 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 주유산(舟遊山, 현 배론성지 터) 토굴 속으로 피신했다. 그는 토굴 속에서 명주천에 신유박해 전말에 대한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내용의 글을 썼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돼 1801년 9월 체포됐다. 같은 해 11월 그는 서울로 압송됐고, 서소문 밖(현 서소문공원 일대)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한 토굴은 1987년 이원순 서울대 교수의 고증으로 배론성지(충북기념물 제118호) 내 복원됐다. 이곳에서는 교우촌(신앙촌) 사람들이 항아리를 굽던 가마가 재현돼 있는 등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한국천주교 초기 신자들은 이곳에 숨어 공동체 생활을 이루며 살아왔다. 천주교인들의 피난처였던 배론성지, 지난달 말 이곳을 찾았다. 성지 곳곳에 내린 눈으로 겨울의 선물인 설경이 펼쳐졌다.

‘배론(舟論)’은 성지 주변 산골짝 모양이 배 밑바닥 형상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론성지는 구학산과 백운산 연봉들이 에워싸 만들어낸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황사영 토굴’ 옆 교우촌 사람들이 항아리를 굽던 가마가 재현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황사영, 토굴 서 1만 3384자 백서 작성

맨 먼저 황사영의 토굴을 찾았다. 많은 돌을 쌓아 입구를 냈고, 토굴 속 크기는 17㎡(5평) 남짓했다. 황사영은 이곳을 옹기 저장고로 위장해 8개월간 버텼다. 은신 기간에 122행으로 구성된 1만 3384자의 백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는 의금부에 의해 체포됐고, 백서는 압수됐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황사영이 백서를 기록한 토굴(1988년 복원). ⓒ천지일보(뉴스천지)

김훈 작가의 장편 소설 ‘흑산’에는 황사영의 체포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종사관은 지체없이 군사를 배론으로 보냈다. 군사들은 새벽 옹기마을에 들이 닥쳤다… (중략)… 황사영은 토굴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머리맡 서안 위에, 비단에 쓴 밀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 극세필의 붓 한 자루와 벼루가 놓여있었다… (중략)… 군사들이 토굴 입구를 막은 옹기를 걷어낼 때 황사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횃불을 든 포졸이 토굴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포교군관이 따라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싶어서, 황사영은 눈을 크게 떳다. ‘야, 알렉시오. 너 황사영이지?’ 포졸이 황사영을 끌어내 묶었다. 포교군관이 토굴 내부를 수색했다… (중략)… 군관은 밀서와 벼루, 붓, 서안, 요강과 필사본, 천주 교리서 몇 권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오늘날 천주교인들은 황사영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의 흘린 피가 있었기에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처형 당시 황사영은 겨우 27세, 젊디젊은 청년의 나이였다.

◆우리나라 최초 신학교 ‘배론신학교’

토굴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가집이 보였다. 천주교 프랑스인 신부들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다. 1855년 초 조선교구의 장상이던 메스트르(1808~1857) 신부는 성인 장주기(1803~1866) 요셉의 집에 ‘배론신학교(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프랑스 외방선교회 푸르티에(1830~1866)와 프티니콜라(1828~1866) 신부의 지도로 김 사도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등 10여명의 신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신학교 내부는 2칸의 방으로 구성돼 있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 여기에는 신학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돼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재현됐다. 또 한 쪽 벽에 건 십자가와 방에 놓인 호롱불 등에서 신학을 배우고자 했던 이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배론신학교는 숱한 박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구장 베르뇌(1814~1866) 주교의 지원과 신자들의 기도 등에 힘입어 운영을 이어갔다. 1866년에는 라틴어과정 4명과 신학과정 2명 등 8명의 신학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이내 일어나면서 장주기를 비롯한 프티니콜라·푸르티에 신부와 여러 신학생이 순교했다. 이에 배론신학교는 개교 11년 만인 1867년에 폐교됐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2003년 충북도의 지원으로 복원됐다.

▲2003년 복원된 ‘배론신학교(성 요셉 신학교)’. ⓒ천지일보(뉴스천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묘

이곳에서는 최양업(1821~1861) 토마스 신부를 빼놓을 수 없다. 최 신부의 동상과 조각공원, 묘소 등이 조성돼 있다는 곳을 둘러봤다. 배론신학교에서 조각공원으로 넘어가는 길목 멀리서 예수 그리스도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있는 모습의 동상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의 성모마리아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각공원은 최양업 신부의 동상을 비롯해 그의 일대기가 조각된 곳이자 성직자들의 납골을 안치해 만들어진 납골묘역이기도 하다. 조각공원은 가운데 예수상을 기준해, 양옆으로 길게 설치됐다. 조각공원 옆으로는 배론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김대건(1821~1846) 신부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다. 그는 매년 2800여㎞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땀의 순교자’라고 불린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동상을 비롯한 그의 일대기가 조각돼 있는 조각공원. ⓒ천지일보(뉴스천지)

1836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성직자 모방(Maubant, P) 신부는 3명(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의 신학생을 선발했다. 신부 수업 중 최방제는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김대건은 선교활동을 벌이다 1846년 순교했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더 열정으로 선교활동에 정진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울산 울주군에서 숨어 지냈다. 최 신부는 베르뇌(Berneux) 주교에게 사목활동 보고를 위해 서울로 향하던 중 경북 문경에 있는 교우촌에서 1861년 6월 40세의 나이에 과로로 병사해 이곳 배론신학교 뒷산 언덕으로 옮겨졌다.

조선 천주교의 끝없는 수난에도 신앙인들은 천주(天主)를 등 돌리지 않는 절개를 지켰다. 희망이라고는 천주(하나님)밖에 없던 박해의 연속, 어두웠던 나날들. 토굴 속에서도 피울음 삼키며 신앙의 자유를 외친 간절하고도 절박했을 순교자들의 영혼이 우리 마음에 울림이 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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