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씨가 스스로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의 자퇴서 전문을 읽고 또 읽어보았다. 처음엔 가슴이 답답하더니 두서너 번 찬찬히 더 읽어 보며 가슴이 뜨거워져가는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표창처럼 가슴에 꽂혀 왔다. 바로 그 또래의 대학생 딸을 둔 아빠로서, 또한 30여 년 전 질풍노도처럼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겠다며 대학 캠퍼스를 질주하며 살았으나 어느덧 보수적 기성세대가 돼 버린 나약한 중년으로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 모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김 씨는 자퇴서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그가 서술한 여러 말 중에서 나는 ‘거부한다’는 단 한 구절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을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나는 그의 자퇴서가 한 젊은이의 개인적 자퇴서가 아닌 이 시대를 향한 선전포고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수월성교육이 지고지선이요, 신자유주의가 최고의 이데올로기로 여겨지는 오늘 한국사회에 조목조목 섬뜩한 경고를 날린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고민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하지만 푸른 초원으로 달려가고 싶은 그의 자유의지는 주위를 에워싸는 현실이라는 질곡에서 신음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는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를 설파한다. 그는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과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하는 기업’이 바로 적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진단은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터득한 것이기에 더욱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그는 결국 자퇴라는 극단적 몸짓을 통해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고민하고 있는 제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시계바퀴를 30여 년 전으로 돌려본다. 그 시절 많은 젊은이들은 ‘대학이 곧 양심’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명제를 가슴에 안고 시대를 앓았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독재권력과 최루탄에 맞섰다. 일부는 화염병을 들었고 더 치열한 고민을 못이긴 일부는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바로 그 헌신과 희생이 바탕이 되어 우리 사회는 민주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의 이면 속에서 대학가는 다시 무한경쟁의 정글로 타락해갔다.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들의 원죄이다. 저 가녀리고 순정어린 젊은 영혼들이 취업사관학교와 고시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신음하도록 몰아붙인 게 바로 우리들이다. 때문에 김예슬 씨의 자퇴서는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마무리에서 이렇게 항변을 정리한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성공만능의 시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순응하기보다는 한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선언한 김 씨에게 내가 해줄 말은 딱히 없다. 이미 그가 세상의 진리를 엿보았으니, 그 해결책도 스스로 찾아낼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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