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스틸 (제공: 두산아트센터)

리뷰 | ‘썬샤인의 전사들’

어린 소년병의 수첩 매개체로
1940년대부터 2019년까지
시대 속 개인의 아픔 곱씹어

무대 전체 뛰어다니는 배우들
시공간 초월하며 현장 이끌어
150분 다소 길지만 필력 압도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똑 똑 똑똑 똑 똑 똑.”

암전 속에서 길게 두 번, 짧게 두 번 그리고 다시 길게 세 번. 알 수 없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는 한국 근현대의 사건 속에 치유되지 않고 갇혀버린 가슴 아픈 기억을 불러내는 소리다.

2019년 봄. 주인공 ‘한승우(김종태 분)’는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3년 전 K타워 붕괴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고 슬픔에 빠져 펜을 잡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실종된 딸 ‘봄이(박주영 분)’가 나타났다.

“정의로운 썬드라 언니가 악당 블랙 드락을 물리치 위해선 거울이 필요해!”

‘한승우’는 딸의 부탁을 계기로 3년 만에 글을 쓰기로 한다. ‘한승우’가 쓰기 시작한 이야기는 한 일기에 얽힌 사람 사는 이야기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카투사 소년병 ‘선호(전박찬 분)’는 어렵게 얻은 종이에 가죽을 덧대 일기장을 만들었다. 이 작은 수첩은 화가가 되고 싶은 조선족 중공군 ‘호룡(노기용 분)’에게, 다시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 인민군 군의관 ‘시자(정새별 분)’ 손에, 어린 시절 공장을 다니다가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시자’ 동생 ‘시춘(우미화 분)’에게로 전해진다.

▲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스틸 (제공: 두산아트센터)


일기에는 제주도 4.3 사건 당시 동굴 속에서 잠든 ‘나선호’의 동생 ‘명이(심재현 분)’, 한국전쟁에서 나무상자에 갇혀버린 전쟁고아 ‘순이’, 일제강점기 만주 위안소에서 몸과 영혼을 빼앗긴 식모 ‘막이(이지혜 분)’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연출 부새롬)’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통해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 남은 이의 부채의식 등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깊은 슬픔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군부독재 등 거대한 사건 속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동안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들어왔던 이야기지만 이 작품에선 조금 다르다. 극 중 주인공 ‘한승우’가 직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사건을 보고, 듣고 전개한다. 마치 잊어선 절대 안 되는 일이라며 한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발버둥 치는 것 같다. 또 등장인물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꽂힌다.

▲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스틸 (제공: 두산아트센터)


극은 시대가 달라졌어도 변하지 않은 오늘에 대한 분노와 질문을 던진다. 극은 오로지 ‘승우’의 시점에서 진행돼 그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며 개인의 절망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썬샤인의 전사들’은 큰 역사라는 틀 안에 작은 개인의 사소한 행위에 대한 위대함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어쩌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따라가던 ‘승우’는 자신이 쓰는 소설 속에서 자신을 만나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공연시간은 150분으로 다소 길지만 막이 끝날수록 더욱 대사에 집중하게 한다. 작가의 필력은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대단하다.

배우들은 극장 전체를 이용한다. 객석 앞뒤 좌우를 뛰어다니며 전쟁의 급박한 상황을 전달해 그 현장에 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때로는 사방으로 흩어져 한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상황에서도 자연스러운 사투리와 연기력으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거의 퇴장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극을 이어가는 ‘한승우’ 역을 맡은 김종태의 열연이 인상적이다.

▲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스틸 (제공: 두산아트센터)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받은 김은성 작가는 “‘썬샤인의 전사들’은 작가를 찾아오는 갇혀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며 “작품을 처음 구상하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어버린 아픔으로, 사랑하는 아이들을 다시 찾겠다는 각오로, 작업에 임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주도 동굴에, 장진호 협곡의 나무상자에, 만주 위안소의 쪽방에, 전장의 얼어붙은 참호 속에, 방공호 속에, 토굴 속에, 감옥 속에, 그리고 차디찬 바닷속에 갇혀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펜을 갈았다”고 덧붙였다.

동시대 문제의식과 연극의 근원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김은성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2012년 연극 ‘목란언니’로 동아연극상 ‘희곡상’,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두산연강예술상 공연부문 등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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