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아가씨’ 스틸. (제공: CJ엔터테인먼트)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독창적인 소재와 섬세한 연출, 탄탄한 스토리로 특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박찬욱 감독이 영화 ‘아가씨’로 팬들에게 돌아왔다. 국내에선 7년 만에 나온 그의 영화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와 그 재산을 노리는 백작 후지와라(하정우 분)’. 그리고 백작에게 거래를 제안받아 히데코의 하녀가 되는 ‘숙희(김태리 분)’, 아가씨의 후견인 ‘코우즈키(조진중 분)’까지 돈과 마음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영화 내용을 바탕으로 숙희의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안녕. 난 숙희라고 해. 나는 히데코 아가씨의 하녀로, 아가씨의 방과 연결된 골방에서 지내고 있지. 난 원래 보영당에서 자랐어. 보영당은 겉으론 고아들을 키우는 고아원이지만 사실 작물이 오가는 최고의 작물거래소지. 나는 전설적인 여자 도둑의 딸이어서 그런지 보석 진품을 구별하는 능력을 타고나서 보영당에서 에이스로 일했어.

어느 날 후지와라 백작이 한 가지 제안을 했어. 부자 아가씨 히데코를 백작에게 반하게 해서 정신병원에 넣은 뒤 재산을 챙기자고. 제주도 노비 출신인 백작은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하고 귀족보다 더 귀족 같은 면모를 보이는 능구렁이 사기꾼이거든. 거절할 이유가 있었겠어? 한 몫 챙겨서 이 기회에 지긋지긋한 식민지 조선을 떠나기 위해 제안을 받아들였지.

백작의 설계대로 먼저 히데코 아가씨의 하녀가 되기로 했어.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갔지. 저택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웅장했어. 현관에서 건물까지 차로 타고 한참을 가야 했지. 저택은 유럽 양식 건물과 일본 전통 양식 건물이 하나로 붙어 있는 특별한 건물이었어.

그리고 아가씨를 처음 만나게 됐는데 세상에! 백작은 말 좀 해주지. 아가씨가 말도 안 되게 예쁜 거야. 곱게 자라서 그런가 야리야리한 몸매며, 하얀 피부, 목소리까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어. 또 고급지고 아름다운 수십벌의 드레스와 장갑, 모자는 나를 사로잡았어. 결국 나중엔 다 내 손으로 들어오게 될 것들이지.

“욕을 해도 좋고, 도둑질도 좋은데 나한테 거짓말만 하지마 알았니?”

히데코 아가씨가 나에게 한 말이야. 아가씨의 일과는 뒷동산에 산책가거나, 후견인 나리와 낭독연습을 하는 게 전부야. 낭독연습을 하는 코우즈키 나리의 서재는 마치 일본식 가옥을 바탕으로 서양식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책장, 분재와 기암석, 물과 자갈이 깔린 실내 정원이 꾸며져 있어. 마치 또 하나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소름 끼치는 곳이야. 이곳에서 ‘은밀한 낭독회’를 하는데 왜인지 아가씨는 낭독의 낭자만 들어도 두통을 호소해.

이 큰 저택에서 아가씨의 재산을 갖기 위해 결혼하려고 하는 이모부와 정 없는 하녀들 등 마음 둘 곳이 없어. 게다가 사기꾼 백작까지. 함께 지낼수록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아가씨가 점점 가엾고도 가여워져. 가짜 백작한테 마음을 빼앗긴 아가씨를 두고 내가 떠날 수 있을까. 그런데 아가씨를 백작에게 주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은 뭐지.

 

▲ 영화 ‘아가씨’ 스틸. (제공: CJ엔터테인먼트)

◆박찬욱 감독의 색이 담겼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아가씨’를 총 3부작으로 구성했다. 1부작에서는 하녀 숙희의 시각으로 사건을 그려주고, 2부작에선 아가씨 히데코의 시각으로 재구성한다. 3부작에선 두 여자가 만나 모든 사건이 종합되면서 백작과 이모부 등 모두의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는 창의적인 내용과 급속 전개로 흥미를 유도한다. 1부작과 2부작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시점에서 설명하는 회상 신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는 앞서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으로 구축해온 박찬욱 감독의 장기가 응축된 작품이다.

특히 박찬욱 감독이 언급했던 ‘하녀 숙희가 아가씨 히데코의 뾰족 튀어나온 이를 쇠골무로 갈아주는 장면’이 매혹적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이 시점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감독이 신인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김태리는 신입답지 않은 당당함과 연기력으로 순진하면서 교활한 숙희를 완성했다. 처음 보는 얼굴과 목소리는 마치 하얀 도와지에 그리기 시작한 채색화 같다. 반면 히데코 아가씨로 분한 김민희는 어수룩한 모습 안에 다른 얼굴을 숨기고 있어 부드럽지만 색이 없는 수묵화 같다.

여기에 조진웅과 하정우가 마지막에 신분상승을 위해 욕망을 쏟아내는 장면은 영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두 배우는 잔혹하고 위선적이며, 혐오스럽기까지 한 백작과 이모부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또 히데코의 이모로 나오는 문소리는 짧은 분량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뮤즈로 불리는 김민희보다 김태리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제목과는 모순적이다. 영화는 지난 1일 개봉해 절찬 상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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