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왔다. 다가온 유월은 반갑다기보다 오히려 버거운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니 이유는 뭘까. 아마 우리에게 있어 유월은 너무나 아픈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고 살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유월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달이면서도 어쩌면 꼭 기억해야만 하는 달인지도 모른다. 동족상잔(同族相殘), 동족을 향한 총부리는 400만(당시 삼천만 동포)의 희생자를 냈으며 강산은 잿더미로 변했으니,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비극의 역사다. 그리고 그 비극은 오늘날까지 ‘정전’과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으며, 동시에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해방에 앞서 8월 10일, ‘포츠담회담(1945.7.17~8.2, 처칠 트루먼 스탈린)’에서 결정한 대로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나눠, 남한은 미군이,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분단의 비극은 시작됐다. 이어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할 것을 결정하게 되면서 남과 북의 정치적 대립 또한 본격화됐다. 남과 북은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38선이 군사분계선이라는 인식을 미처 하지 못하던 터라 남북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그 후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9일 북한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부터 남북의 긴장감은 점점 고조돼 가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화염은 뿜어졌다.

6.25전쟁 발발 당시 남과 북의 군사력은 남한이 10만, 북한이 20만 해서 북한이 두 배나 높았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는 전차가 242대나 있었지만 남한은 단 1대도 없었다. 특히 소련제 T-43전차는 국군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기였다. 당시 군 상황을 살펴봐도 북한은 6월 한 달 동안 후방에 있는 병력을 휴전선으로 전진 배치시켜 왔으나, 우리는 6월 25일 일요일 농번기를 맞아 많은 병력이 휴가와 외출을 나가 있는 상황에서 기습공격을 당했으니 황당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파상공세에 밀려 결국 우리는 3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한강철교를 폭파해 500명이 넘는 국민을 한강에 수장시켜가면서까지 북의 기습공격을 지연시킬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들이었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한강철교 구조물을 붙잡고 목숨을 건 피난민의 행렬은 남으로 이어졌다. 이후 낙동강 방어를 위한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서울 수복 및 반격작전, 1.4후퇴, 휴전 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 등 3년간의 전쟁이 남긴 상처와 흔적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분명한 것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의사와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국군의 지휘부가 있는 용산 국방부 청사 맞은편에는 처참했던 그 날을 생각나게 하는 건물 하나가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바로 ‘전쟁기념관’이다. 그런데 왠지 석연치 않은 것은 동족끼리 싸워야 했고, 수많은 희생을 가져 왔고, 강산은 잿더미로 변했는데, 이를 과연 후대가 기념해야 할 일인가. 아니라면 어떤 연유에서 이러한 이름이 생겨났을까. 우리나라와 우리군의 입장에서 붙여진 이름일까. 아니면 미군의 입장에서 붙여진 이름일까.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다 맥아더 장군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收復)하고, 연이어 10월 1일 38선을 돌파할 수 있었으니, 그 날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지정된 날이 ‘국군의 날’이다. 그렇다면 10월 1일은 우방국 미군에 의해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그 날이 우리 대한민국 국군의 날로 지정된 셈이다. 나아가 그 선상에서 전쟁기념관이란 이름도 자연스럽게 붙여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미군의 도움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했으니 고마운 일이며, 기념해야 할 일은 맞다. 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측면 즉, 우리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왠지 석연찮은 점이 없지는 않다.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보다, 전쟁으로 인해 얻게 된 상처와 흔적을 남겨 후대에 교훈으로 삼게 하는 ‘전쟁상흔관(戰爭傷痕館)’과 같은 이름이 더 적절하지는 않을까.

전쟁기념관이 위치한 용산(龍山), 이 용산은 예부터 이방군대의 본부가 주둔해 왔던 주둔지라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청나라 군대, 구한말에는 일본 군대, 오늘날에는 미군이 점령하고 있다. 이 나라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늘 우리 군의 본부가 있는 용산에 이방군대를 주둔시켜 왔으니 간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도 어떠한 관점에서 지어졌는지 냉철하게 생각해 볼 때도 된 것 같다.

반도국(半島國)이라는 지리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늘 외세의 말발굽아래 있으면서 본의 아니게 전쟁의 회오리를 피해갈 수 없었던 민족이다. 원인이야 어찌됐던 그 고통스런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보다 평화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세계를 이뤄 가는 데 있어 함께하고 협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이 유월은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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