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1년 11월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을사늑약 106주년 규탄 기자회견’에서 곽승현씨가 애국가무용을 펼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독립운동가 곽종석 선생 후손 곽승현씨 인터뷰

태극기 담은 흰 한복 입고, 나라 사랑하는 춤사위 펼쳐
무용실력, 최고는 아니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만은 최고
숭례문 복원 5년간 비나 눈 오는 날씨에도 버선발로 춤 춰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다짐하기 위하여 온 국민이 부르는 노래 애국가. 여기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것이 특징인 애국가를 배경음악으로 춤사위를 선보이는 이가 있다. 바로 한국유림대표로 한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면우 곽종석 선생의 증손녀 곽승현(74)씨다.

머리는 쪽을 틀어 옥비녀를 꽂고, 태극기가 그려진 하얀 한복을 휘날리며 애국가에 맞춰 창작무용을 하는 곽승현씨. 애국가 1~4절까지 장단에 맞춰 신명 나게 추지만 그의 손끝에선 애잔함이 느껴진다. 그의 춤엔 증조할아버지 곽종석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과 나라 사랑이 담겨 있는 게 특징이다.

곽씨의 나라 사랑 춤사위는 ‘춤을 배웠으면 뭔가 해내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환갑이 넘도록 집안일에 충실한 전업주부였던 그는 10여년 전 노인복지관에서 우연히 한국무용 입문반을 수강하게 됐다. 그곳에서 한국무용에 매력을 느낀 곽씨는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 등록했고 이때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교육을 졸업한 곽씨는 배운 만큼 나라를 위한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고심하던 중 애국가를 떠올렸다.

“애국가 1~4절에 맞춰 독립운동가의 삶을 담아 춤을 추니 동작이 딱 맞아떨어졌어요. 정말 신기했죠. 어느날 현충일 독립기념관에서 할아버지 증손녀라고 초대를 해줬죠. 관계자에게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하니 특별히 무대에 올려 줬죠. 후손으로서 그런 무대에 선다는 게 정말 감사했어요.”

평소 곽씨는 독립운동가를 조상으로 두고 있으면서 부족한 후손이라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 곽승현씨가 태극기를 들고 무용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하지만 춤을 통해 자신과의 갈등을 극복해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독립투사들의 간절한 마음을 춤사위로 표현한 것이다. 소박하고 투박하지만 그의 춤으로 표현되는 애국심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는 2007년 ‘제52회 현충일기념식’과 2008년 국제창작서화미술대전, 2009년 3.1절 제90주년 행사와 한민족문화예술제, 2010년 개천절 행사, 3.1절 행사, 2011년 김구 선생 추모행사 등 다양한 무대에 올랐다. 또 일본 및 미국대사관 앞, 안양시청 월례조회 식전공연, 안양문화원 단오제행사, 민예총 대보름축제 등에서 공연했다.

특히 숭례문 복원 기간 5년 동안 현장에서 매달 공연해 눈길을 끌었다. 곽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 달에 한 번씩 숭례문의 무사 복원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춤을 췄다.

“어떤 날은 무대 바깥까지 나가 춤을 추다 보면 버선이 젖어서 발이 전부 젖기도 했어요. 더운 날도 추운 날도 많았는데 춤을 출 땐 힘든지 몰랐어요. 매달 하면서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무용가면에선 경력이 부족하고 실력도 부족하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곽씨의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공연을 끝내고 내려오면 많은 분이 ‘가슴이 찡했다’ ‘감동적이었다’ ‘어떻게 애국가에 맞춰 춤을 출 생각을 했냐’ 등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표현이 서툰 남자분들이 오히려 더 칭찬해주신다니까요.(웃음)”

이 같은 말을 하면서 곽씨는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소녀 같은 얼굴로 쑥스러워했다. 그의 애국가 공연은 바로 그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증조할아버지는 청렴결백하신 분이었어요. ‘나라가 망하는데 내 사진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며 사진 한 장 찍지 않으신 분이에요. 고종 황제와 독대할 때 자신의 처신보다 나라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시고 큰 소리도 마다치 않으셨어요. 그런 분의 자손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곽씨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다가도 곽종석 선생 이야기만 나오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여성에겐 교육하지 않는 유교 집안에서 자라 곽 선생에 대해 어른에게 배운 적은 없다. 책상에 놓여 있는 할아버지 책을 보고, 어깨너머로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은 다른 후손보다 더 많았다.

“바란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무용할 거예요. 저희 작은 손짓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 나라의 모든 일이 잘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파리장서운동 대표 곽종석 선생

조선 말기 유학자였던 곽종석(1846~1919년)은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나 고종 초기 중추원 의관이 됐다. 1903년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했고, 참찬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했지만,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운동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에서 은거했다. 그러던 중 1919년 기독교계와 불교계의 주도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교계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국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거창에서 김창숙과 협의해 137명의 유교 학자들과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다.

파리장서의 대표인 곽종석은 이 일로 2년형의 옥고를 겪던 중에 옥사 직전에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여독으로 곧 숨을 거뒀다. 저서는 시문집 ‘면우문집(俛宇文集)’이 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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