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부모은중경’은 석가가 제자 아난에게 부모의 은혜를 설법한 불교경전이다. 천수백년 동양의 정신을 지배해온 불멸의 저술이며 불가의 성전(聖典)이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은 채 수미산(须彌山)을 백천 번 돌더라도 다 갚을 수 없다는 글이 나온다. 아! 부모의 은혜에 대해 이처럼 뭉클하고 설득력 있는 명문장이 있을까.

게송(偈頌.禪詩) 하나를 들어 보자.

‘죽어서 이별이야 말할 것도 없고 / 살아서 생이별 또한 고통스러운 것 / 자식이 집 떠나 멀리 나가면 / 어머니의 마음 또한 타향이 집이라네 / 낮이나 밤이나 자식 뒤쫓는 마음 / 흐르는 눈물은 천 갈래인가 만 갈래인가 / 새끼를 사랑하는 어미원숭이 울음처럼 / 자식생각에 애간장이 녹아 나네….’

이 경전이 중국에서 한반도에 전래 된 시기는 천수백년 전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그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많이 보급되었으며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 와서도 왕실의 존중을 받았다. 불교를 배척 했던 조선사회에서 이 경전이 널리 유포된 것은 ‘효가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유교의 근본이념과 맞아 떨어 졌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 경을 읽으면서 부친 사도세자를 생각하고 통곡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경을 널리 읽히기 위해 화가 김홍도를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언해본을 간행토록 했다. 또 명을 내려 경기도 화산(華山)에 있는 용주사에 ‘부모은중경’ 비를 세우도록 했다.

천지일보에 의해 특종 발굴된 ‘옥책(玉冊) 부모은중경’은 간기에 ‘弘圓寺 峻豊3 年 終’이라는 글씨가 있어 고려 초 광종(光宗) 13년(962AD)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왕도 개경에서 가까운 황해도 해주에서 나오는 수암옥을 홀(笏)처럼 다듬어 1㎝정도 크기의 글씨로 수 천자가 되는 부모은중경 전문을 새긴 것이다.

서지와 서예 전문가들은 글씨는 잘 쓰지 않았으나 통일신라 고려 초에 유행했던 안진경체와 구양순체를 닮은 해서, 행서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옥책의 글씨는 비석처럼 화강암에 밑 글씨를 써 붙인 후 각자한 것이 아니라 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각수(刻手)에 맡겨 예리한 기구로 써내려간 것이므로 품격이 조금 떨어진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개경의 대표적 원찰인 홍원사에서 귀중한 옥으로 부모은중경을 간행했던 것을 보면 왕실의 발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에 옥은 일반 평민들이 사용할 수 없었던 귀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찰에서 왜 이 옥책경전이 간행된 것일까. 광종(光宗)은 고려 제4대 임금으로 준풍(峻豊)이라는 독자 연호를 쓰고 칭제(稱帝)한 영주였다. 그는 신하와 백성들에게 ‘황제 폐하’로 불리었다. 모든 제도와 복식 등을 정비했으며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광종은 충주출신 호족 유금필의 딸인 신명순왕후(神明順成王后)의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충주 신니에 대찰 숭선사(崇善寺)를 창건하여 모친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지극히 효자였던 광종이 개경 홍원사에 옥책을 시주함으로써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식이 부모를 살상하고 거역하며 방기하는 패륜의 시대. 부모은중경 옥책의 발견은 시사점이 많다. 필자는 어떤 보물급 문화유산보다 값진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시성 타골은 일제 강점시기 한국을 지칭하여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탄했다. 효와 예양이 살아있음을 높여 아시아의 빛과 같은 나라라고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했지만 인륜점수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부모은중경 옥책’의 출현은 우리 사회에 ‘효행 회복’의 불을 지피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만 같다.

▲ 부모은중경 옥책 (사진제공: 소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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