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 선생 묘소 앞에선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주최하는 ‘친일인명사전(전3권) 발간 국민 보고대회’가 열렸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64년이 지나 4389명의 친일행위자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거기에는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한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었으며, 그들 후손 가운데 일부는 친일인명사전이 발표되지 않도록 법적 싸움은 물론 많은 반대를 해 왔었다는 후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해온 윤경로(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국민들에게 보고드린다는 형식으로 발간사를 통해 당사자들에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것을 강하게 주문했다.

물론 친일행각이 사실인 당사자들이라면 세월이 얼마가 흘렀던 백 번 천 번이라도 사죄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친일행각이 조국과 동포의 가슴에 얼마 만한 고통과 한을 남겼는지를 분명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었던 일정의 앞잡이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지경인 것은 필자의 생각만은 아니리라. 6.25의 동족상잔(同族相殘)을 치르면서도 소위 빨갱이보다 더 빨갱이는 누구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너무나 감당할 수 없었던 기억이어서일까. 6.25를 겪은 후 우리는 6.25 못지않은 고통과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연좌제(緣坐制)였다. 관련도 없고 죄도 없는 일가친척, 친지, 그리고 그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고통과 손해를 잊지는 않았으리라. 분단의 현실은 분단 그 자체를 넘어 모든 것을 갈라놓고 말았다.

이제 이 연좌제의 기억이 사라지려는가 하는 순간 친일관련 과거사를 인정하고 밝혀야 한다는 미명하에 제2의 연좌제가 고개를 들고, 아니 실명까지 거론되는 순간이다.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친일인명사전인가, 아니면 또다시 분란과 편견과 편파를 향한 친일인명사전인가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친일인명사전 발표와 동시에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잊었던 역사 속으로, 또 다른 가치관 속으로 다시금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파란만장한 운명처럼 또 숙명처럼 살아온 질곡의 역사 앞에 감히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으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지 참으로 아쉽다.

우리가 진정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따로 있다. 왜 우리가 일제치하에서 곤욕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짚어 보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 힘 없음은 바로 무지의 결과였다. 동포의 무지를 깨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지자, 선구자는 오히려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의 문명과 문화를 배울 수밖에 없었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그들과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억지로 부인만 할 것인가.

또 조국의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선 한 쪽에선 그들과 하나 되어 돈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때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야말로 조국을 배반하고 자신의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아온 친일행위자가 있었다면 회개하고, 조국과 역사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고 무조건적 매도가 과연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지나간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된다 했으니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국호가 말하듯 대국(大國)의 기질을 가진 자들의 지혜로움일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필자가 느끼기엔 작금의 시대 상황에선 너무나 맞지 않은 컨셉인 듯하다. 이 시대는 대립과 분열, 편파와 편견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미 그러한 의식과 가치관은 구시대의 유물로 보관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 지금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상생의 길을 어찌하면 모색할까 고민하는 새 시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식민 지배국이었던 일본은 친일명부로 인해 다시 찬반논쟁 속으로 들어가는 한민족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하는 생각 정도는 할 줄 아는 현명한 지식인들이 됐으면 한다.

이젠 분열이 아닌 통합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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