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충절의 상징 ‘계백’
의자왕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황산벌 전투’에는 백제의 명장 계백이 있었다. 계백은 백제 말기에 달솔을 지낸 군인으로 부여현 충화면 팔충리 출신이며 흥수·성충과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린다.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계백 장군은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5만 명의 적과 싸우다 전사한 명장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계백 장군은 출정하기 전 “우리는 이제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한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니 국가의 존망과 나의 목숨이 어찌될지를 예측할 수가 없다. 혹여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하여 가족을 모두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또, 그는 황산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맹세하기를 “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계백과 5천 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네 차례 몰아냈으나 결국 화랑 반굴과 관창이 전사하자 사기가 오른 신라군에 의해 다섯 번째 전투에서 패하였고 계백도 전사했다.

패장이지만 백전백승의 장수보다도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계백은 백제 정신의 상징이 되고 있다.

한국영화 부흥사 신상옥 감독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가운데 한 명인 故 신상옥 감독. 한국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세우며 영화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故 신 상옥 감독의 뜻을 기리기 위해 ‘공주신상옥청년영화제’가 만들어졌다.

공주신상옥청년영화제는 2007년 개최를 시작으로 올해로 제3회째를 맞이해 총 340여 편의 작품이 공모됐으며, 14개 부문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됐다.

그의 영화인생은 1945년 영화감독 최인규와의 인연을 통해 시작됐다. 최인규가 감독한 영화 ‘자유부인(1946)’의 미술감독과 ‘독립전야(1948)’의 조감독을 거쳐 1952년 16㎜ 영화 ‘악야’를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이 됐다.

이후 ‘꿈(1995)’ ‘상록수(1961)’ ‘성춘향(1961)’ ‘빨간마후라(1964)’ 등 75편의 작품을 연출하고 2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부흥을 주도한 작가 중 하나이며 1966년 신필름, 1978년 신필름영화촬영소(북한), 1986년 신프로덕션(미국), 2002년 안양신필름예술센터 등 영화제작 및 후학양성을 위한 기관 설립에도 혼신과 열정을 바쳐온 영화인이다.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장호 감독은 “신상옥 감독은 한국사회, 한국영화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며 한국인으로서의 숙명적인 삶과 현대사의 풍운을 고통과 희열로 겪어야 했던 영화계의 거인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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