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남지 전경

궁남지
선화공주와 서동왕자(무왕)의 사랑이야기로 잘 알려진 무왕 때의 별궁 연못 궁남지는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불리게 됐다.

궁남지 주위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고 연못 안에는 다리로 연결돼 있는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7월의 궁남지는 연밭에 피는 연꽃으로 운치를 더하고 ‘서동연꽃축제’도 열려 사람들에게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와 화려한 연꽃을 선사한다.

 

 

▲ 낙화암

낙화암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년)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백제역사재현단지
1994년부터 충청남도와 문화관광부가 부소산과 낙화암 맞은편 백마강변에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짓고 있는 단지이다.

총 100만 평 규모로 역사재현촌·백제역사민속박물관·연구교육촌으로 나뉘어 2010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이 중 역사재현촌에는 개국촌·왕궁촌·전통민속촌·군사통신촌·장제묘지촌·산업교역촌·풍속종교촌 등 7개의 기능별 촌이 들어서고, 백제역사민속박물관에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에 첨단 영상기법과 매체를 활용한 전시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밖에 연구교육촌에는 백제시대 연구와 학술교류 중심지로 활용할 한국전통문화학교·예술인마을·호텔·컨벤션센터 등이 들어설 계획이다.

 

 

 

 

▲ 백제역사재현단지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ㆍ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ㆍ치성ㆍ고대ㆍ장대ㆍ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ㆍ영은사ㆍ연지ㆍ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ㆍ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ㆍ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했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년)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년)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년)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 공산성

황새바위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800년대 즉,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조 시대에 충청도의 각 지방에서 잡힌 사학죄인들이 숱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아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공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래도 배반하지 않으면 감사의 명에 의해 사형대에 오르게 돼 있었다. 죄인들의 공개 처형지였던 이곳 황새바위는 황새가 서식했던 곳이기에 황새바위라고도 하고, 이곳에 있던 바위가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황새 모양이고 목에 큰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죽어 갔으므로 황새바위라고도 한다.

무령왕릉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무령왕릉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년)과 왕비가 합장된 능이다.

연도 입구에 놓인 지석(誌石)에 의하면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으며,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을 적은 묘지석이 발견됨으로써 수많은 삼국시대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가 되었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왕릉이라는 점에서 고고학적·역사적 가치가 있다. 백제고분이 대부분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완전하게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된 점도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많은 수의 유물이 발굴됐다. 유물들은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절대 연대가 확인된 유물은 이후 삼국시대 문화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기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귀걸이를 비롯한 금속 공예품들의 정교한 제작 기술을 통해 백제 미술의 발달된 수준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무령왕릉은 전축분이라는 중국 남조 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해 당시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 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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