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목은 선생이 이리저리 두부를 먹는데, 기름에 지져서 먹기도 하고, 토란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기름에 지져서 파뿌리와 함께 넣어 국을 끓여먹기도 했다. 귀하고 비싸다기보다는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음식이라는 뉘앙스다.

실제로 슈퍼마켓에서 두부를 팔지 않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두부를 쉽게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엄청난 양의 콩을 삶고 굳혀야 하니,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잔치 때 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고려 때부터 릉(陵) 옆에는 조포사(造泡寺)를 두어 메주와 두부 등 능에 제사를 지낼 때 올릴 제수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매년 5월이면 임금은 곳간을 열어 이 조포사에 콩을 보내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게 하여 진상케 했으며, 사대부가에서도 콩을 가까운 사찰에 보내 메주를 쑤게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 보면 “두부의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방언이라 생각하여 따로 ‘포’라 했다. 여러 능원(陵園)에는 각각 승원(僧園)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 승원을 조포사라 하였다. 그러나 공사문서에 ‘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포(泡)란 물거품이라 음식이름으로는 부적당하다. 여러 능원에는 각각 승원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니 승원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했다. 그런데 공사문서(公私文書)에 두부를 포(泡)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녹두의 유(乳)를 황포(黃泡)라고 하고 혹은 청포라고 하는데, 공사문서에 이렇게 쓰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했다.

이 조포사로 봉선사(奉先寺) 등이 있다. 어쨌든 우리는 고구려 때로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콩을 이용해 두부 만드는 기술은 고려 때 상당한 수준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금님의 산릉(山陵)을 모시면 반드시 그 곁에 두부 등 제수 음식을 장만하는 조포사(造泡寺)를 두게 했다. 두부는 제사음식에 반드시 올라가는 음식으로 당연히 조포사 역할을 하던 절은 두부를 잘 만들게 됐다.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 보면 예부터 소문난 두부로 개성 제릉(이태조비릉)의 조포사였던 연경사 두부, 세조릉의 조포사인 봉선사 두부라고 했다.

한편 두부는 스님들에게 단백질을 보충하기에 좋은 식품으로 전래되어 사찰이나 사찰주변 마을에서 두부를 잘 만들게 됐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