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자유선거로 정치권력이 편성되는 민주 제도가 아니라면 권력은 무림(武林)이나 총구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고대 중국의 요와 순 임금은 성인(聖人)으로 전해져온다.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없던 그 시절에 이들이 어떻게 나라를 세워 백성의 추앙 받는 왕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과문(寡聞)하다. 이들을 예외로 한다면 후대에 이들 같은 성인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린 일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대신 삼국지(三國志)가 전하고 있거니와 천하의 권력을 다투던 사람들은 야수의 완력을 가진 대담한 무림의 협객들이나 고수들이었다. 이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거나, 세워진 나라의 권력을 빼앗았다. 황제 밑에서 은밀히 힘을 기르면서 황제의 권력을 빼앗으려 배반을 기도하는 제후들도 수하(手下)에 빼어난 무림의 인물들을 끌어 모아야만 했다.

야만스런 완력과 검(劍)은 가공스러운 것이지만 그 수단이야 어떻든 그것으로 얻은 권력은 ‘정의(Justice)’가 되어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검과 완력의 호걸들이 품었던 터무니없어 보이던 천하제패(天下制覇)의 탐욕과 야심은 영웅호걸의 포부로 미화되어 ‘웅지(雄志)’라고 불리게 된다. 지금 이 시대에도 자유선거가 없는 민주주의 사각지대에서의 권력은 총칼로 무장한 군대를 이끄는 장군들과 그들이 거느리는 무력 집단의 총구에서 나온다. 바로 이런 것들이 정치권력의 무단주의(Militarism)적 결정과 독점이다.

민주주의 선거는 권력 편성을 위해 ‘국민의 힘(People's power)’이 행사되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역사 발전이라는 것이 일정한 지향성을 지니는 것인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역사 흐름의 어느 시점에 오늘날의 민주선거제도와 같은 것이 나타나 정치권력을 결정하리라고는 삼국지 시대에는 상상도 못했을 것 같다.

역사는 흔히 큰물이 도도히 흐르는 대하(大河)에 비유된다. 그 대하는 역사의 흐름을 위해 미리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역동적인 흐름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사후의 흔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흔적은 협곡을 뚫고 지나기도 하고, 폭포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펀펀한 평야에 강폭이 넓은 물길을 내기도 하면서 때로는 빠르고 거칠게, 때로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때로는 흙탕물의 와류를 형성하며 폭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물길이 없던 곳에도 물길을 내면서 역사의 대하는 어디로인가를 향해 흘러간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대하의 목적지는 더 말할 것 없이 망망 무제의 바다다. 그렇다면 역사의 대하도 자연의 대하가 바다를 향해 가듯이 필연적으로 지향해가는 곳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간단한 사유(思惟)로서 손쉽게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또 선거, 선거다. 지방자치체의 장과 의원들을 뽑는 지방 선거철이다. 너도 나도 국민과 지역 주민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몸을 드러내 화려하게 말잔치를 벌인다. 지금은 무림의 고수들이나 장군들이 권력을 잡자고 몸을 일으켜 천하를 주름잡는 시대가 아니므로 선거의 고수들이 그들을 대신한다. 그들은 추호라도 사심(私心)을 드러내는 일은 없지만 사심이 있거나 없거나 골치 아픈 선거에 나서주는 노고를 불사하는 이들이 있기에 민주주의의 역사는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노상 있는 선거와 이들의 말잔치를 짜증스럽게 생각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꼭 최고의 권력인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특히나 서울시장, 부산시장, 인천시장 등과 도지사의 권한과 권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 작은 기초단체의 장만 하더라도 수많은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이 부럽지 않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권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예와 실리를 보장해주는 입신양명의 디딤돌이므로 비록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그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 했다. 그런데도 요 임금이 자신의 왕위를 이어 받아달라고 간청했을 때 허유(許由)는 그 말이 자신의 귀를 더럽혔다며 강물에 귀를 씻었다. 그리스 철인 디오게네스(Diogenes)는 알렉산더 대왕이 존경하고 탐내는 인물이었다. 그가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 테니 말하라고 했다. 그때 디오게네스는 천하의 알렉산더 앞에서 냉담하게 “지금 나에게 비치는 햇빛을 가리지 말라는 것 말고는 부탁할 것이 없다”고 무엄하게 쏘아붙였다. 참 멋있다. 그렇지만 그 깊은 심지(心地)가 헤아려질 듯 말 듯은 하지만 요즘 말로 이렇게 꽉 막힌 현실 참여를 부정하는 ‘불통(不通)’들이 많아서는 민주주의는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선거가 정말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하는 과정으로서 참 기능을 발휘하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선거에 나오는 입후보자가 소수이더라도 정말 자격 있는 사람이 나와서 양보다 질로 판단할 수 있는 형편이 되면 좋겠지만 후보가 난립하더라도 바로 그 사람들이 국민의 선택과 참여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뒷소리나 하면서 잘 난 척 하는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기여가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한편 책 ‘장자(莊子)’에 이런 말도 있다. 공자는 가장 아끼는 제자 안회가 ‘의원 집 문 앞에는 병자들이 많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임금의 폭정과 그 폭정으로 신음하는 위(衛)나라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위나라에 가서 그 같은 위나라의 병을 고치겠다’며 위나라로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여러 차례 간청했다. 공자는 거듭 만류했다. “아서라. 포악한 사람 앞에서 인의(仁義)니 법도니를 말하는 것은 남의 못된 것을 이용해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려 하는 것, 위나라에 가려는 것이 진정 그 나라 백성을 위한 것인지 네 명예와 실리를 위한 것인지 냉철하게 살펴본 후에 가든지 말든지 하라”고 했다. 참으로 공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 정도는 꿰뚫어볼 수 있는 성현(聖賢)이었지만 사실은 책 장자에 나오는 공자와 안회는 노장사상의 대가 장자가 자신의 말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 내세운 가상의 인물이다. 따라서 공자와 안회의 말은 바로 장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다.

사람은 이기적 동물이지만 남을 배려할 수도 있고 남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는 동물이다. 선거에 나오는 사람들이 성인도 물리치기 어려운 권력욕과 명예욕을 뛰어넘을 수는 없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정말 국민과 지역 주민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일꾼들이 분명히 있다. 국민들과 주민들이 그런 사람들을 예의 주시해 뽑을 수만 있다면 바로 자신들이 행복해지는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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