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독일 뮌헨에서 학교생활을 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고 싶지도, 관심도 없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무엇보다 권위적인 교사들과 학교의 군대식 규율과 관습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그는 군복처럼 생긴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자세로 발 맞춰 행진을 하는 것을 무엇보다 힘들어 했다. 시가지를 행진하는 군인들을 보고는 “저는 나중에 커서 저 사람들처럼 불쌍하게 되지 않을 거예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은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 국가를 이루었지만 군사 문화 탓에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으며 학교 역시 그러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학교에 가지 않는 게 소원이었다. 그는 자퇴하려 했지만, 학교에서 먼저 그를 내쫓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졸업장도 없이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열다섯 살 때였다. 그 다음 해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자 베른의 아라우 주립학교에 입학했다. 아라우 학교는 독일의 학교와는 정반대였다. 학생들의 창의성과 개성을 인정해 주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고 잠재력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교육이라 믿고 그것을 실행한 페스탈로치의 영향을 받은 학교였다.

아라우 학교는 주입식 암기 교육 대신 학생들이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체득하도록 했다. 야외에서 진행된 지리 수업 중 교사가 지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질문하자,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든 간에 제 눈에는 다 똑같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사는 나무라는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독일이었다면 당장 몽둥이가 날아들었을 것이다.

아라우 학교 시절을 통해 자유로운 사고를 경험한 아인슈타인은 일 년 후 취리히 공과대학에 무난히 합격했다. 취리히 공과대학 역시 아라우처럼 학생들의 창의성과 개성을 존중해 주었고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물리 추상 이론에 몰두할 수 있었다.

취리히 공과대학 졸업 후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1년간 근무했다. 이 기간 중 친구들과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독서 클럽을 만들어 토론을 하곤 했다. 하지만 물리학 공부만은 혼자서 해야만 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덕분에 취리히 공과대학 교수로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닳아빠진 재킷과 짧은 바지 등 그의 형편없는 차림새 때문에 학생들은 실망했다. 하지만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금방 매료됐다. 강의 자료라곤 짧은 메모와 스케치가 담긴 종이 몇 장이 전부였지만 아인슈타인은 학생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핵심을 찔러 강의했다.

아인슈타인은 수업 중 학생들이 마음껏 질문을 할 수 있게 했고, 질문을 하는 학생에게 친근감을 보였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과 함께 학교 앞 카페에서 밤늦도록 토론했다. 권위적이지 않고 학생 개개인들의 사고와 개성을 존중해 준 아인슈타인을 학생들은 친구처럼 따랐다.

아인슈타인은 학생들에게 상상력을 길러주고 깨달음의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 믿었다. 아인슈타인이 세계 문명사에 빛나는 위대한 학문적 성취와 함께 교육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일궈낸 것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아라우 학교와 취리히 공과대학의 학풍 덕분이었다.

‘아인슈타인 우유’를 마신다고 아인슈타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혹시나… 한다. 정답이 우유가 아닌 줄 알지만, 이왕이면… 한다. 정답은 알겠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난감하다. 분명한 건, 우유가 정답은 아니라는 것.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