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동 삼성궁 건국전 앞 모습. 삼성궁에는 수많은 돌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의 소도(성지)를 복원하고자 함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을 건국한 단군할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민족말살정책은 곧 고조선말살정책

[천지일보=박미혜 기자] 1920년대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말살하지 않고는 도저히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원하고도 온전한 식민지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300년 역사를 가진 일본이 5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의 정신력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민족말살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은근하면서도 치밀하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날조하기 시작했다. 그 식민사학의 핵심에 바로 한민족 역사의 시작 ‘단군’이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을 가장 손쉽게 방황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것이 출생의 비밀이듯 조선인들의 구심점, 정신세계를 흩뜨려놓기 위한 최적의 무기가 바로 뿌리를 건드리는 것 곧 뿌리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단군역사에 대한 논란은 광복 60돌을 맞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진행형이다.

몰라도 되는 역사, 알수록 골치 아픈 역사, 특히 국조 단군은 신화요, 미신이요, 우상숭배라는 생각들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일제 강점기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상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조선인을 뿌리가 없는 민족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고 외쳤다.

3대 총독 사이토마코토는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의 외침이 아직도 한반도에 호령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곧 단군이 다스렸던 고조선말살정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는 조선의 정체성과 사상의 뿌리를 말살하기위해 고조선의 존재를 부인했다. 또 임나일본부설 등 한민족의 역사가 일본에서 파생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고조선은 없어져야하는 나라였다.

일제는 고조선의 건국과정을 담은 단군신화를 조작된 것이라 생떼를 쓰기 시작했고 이 일에 일본의 사학자, 한국의 사학자들이 투입됐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해 기록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고려 말기에 써졌는데 고려 말은 몽골의 침략을 겪었을 때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단군신화와 고조선을 허위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주장이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단군신화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도 그 내용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민족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고대사 원로 학자 윤내현 교수는 말한다.

“옛 사람들은 인간만사는 물론 모든 자연현상을 신이 관장한다고 믿었어요. 예컨대 어느 한 씨족이 다른 씨족과 싸워서 이겼을 경우 그것은 그 씨족의 수호신이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죠. 이와 같이 모든 일을 신과 연결시켜 생각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은 사람을 주체로 하지 않고 신들을 주체로 한 내용으로 후세에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화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들의 이야기로 변형된 것이죠. 단군신화를 인간들의 이야기로 바꾸면 우리 민족의 성장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던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단군‘사화(史話)’라고 부르려 합니다. 또 일연스님은 불교 승려였고 이승휴 선생은 유교 학자였습니다. 이들의 학문 경향은 서로 매우 달랐을 것임에도 그들의 저서에 거의 동일한 내용의 단군사화가 실려 있습니다. 이는 단군사화가 오래전부터 전해져왔으며 고려시대에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사편수회는 고조선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전설’이나 ‘신화’로 만들었다. 백제와 신라 초기 이전의 역사는 아예 없애고자 했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근초고왕과 신라의 내물왕이 처음 등장했는데 일본의 역사가 조선보다 앞섰다는 조작을 하기 위해선 그 이전의 역사는 믿을 수 없는 신화 같은 이야기로 전락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사학자들을 제자로 길러냈다. 그중 한 사람이 사학계의 대부 이병도 박사다. 이 박사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깊숙이 관여했고 일제의 시각으로 조선사를 집필했다. 또 조선사편수회의 실무책임자였던 이마니시 류의 제자였다. 이마니시 류는 한국고대사 왜곡에 이론을 제시하며 서울대의 전신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그의 사관은 광복 후에도 사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이병도 박사는 사망하기 3년 전인 그의 나이 아흔에(1986년) “역대왕조의 단군제사가 일제 때 끊겼다”며 “단군은 신화가 아닌 시조”라는 제목 아래 장문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조선일보는 이병도 박사의 글을 1면 머리기사로 싣고, 같은 날 5면 전면에 실어 당시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 1986년 10월9일자 조선일보 5면. 이병도 박사가 '단군은 신화가 아닌 시조'라는 글을 기고해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단군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데 서론이 너무 장황하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조 단군에 대한 시각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져있거나 아예 ‘관심없음’이 요즘의 실태다. 그리고 기자가 고등학생 때 ‘통일기원국조 단군상’이 교정에 세워졌는데 당시 일부 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의 얼굴, 코, 목이 잘려나가고 그 자리에 십자가가 그려지거나 교회에서 단군상 철거를 위해 학생들의 등교거부를 주도해 논란이 됐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나라를 세운 분에 대한 논란이 이토록 극심한데 건국은 왜 했는지,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무슨 뜻인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을까.

▶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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