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에 펄럭이는 영국기, 점령군의 두 얼굴

▲ 거문초등학교. 영국군의 막사가 있었던 곳이다.

영국은 1885년부터 1887년까지 무려 2년 동안 거문도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산위에다 영국기를 게양했다. 타국함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목책을 만들고, 중국군과의 통신을 위해 해저케이블도 만들었다. 남의 나라의 섬 전체를 요새화하며 막사를 지어 수천 명의 군인들을 상주시켰다. 자신들의 놀이를 위한 테니스장도 설치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단침입자와 그 땅의 주인들, 사이좋게 지낼 하등의 이유가 없을법한데 오히려 평화공존이 유지됐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른바 영국의 선무(宣撫)전략이 통했던 것이다. 영국을 괜히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종 공사에 거문도민들을 동원하는 대신 쌀, 엽전 등의 노임을 지불했고 의료 혜택도 제공했다. 도민들을 영국군함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한번은 영국 여왕의 생일을 맞아 축포를 쏘았는데 대포소리에 놀란 개들이 모두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이에 영국 군인이 총동원되어 도망간 개들을 잡아오기도 했다.

영국군은 거문도민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갔다. ‘무단’으로 쳐들어온 군사조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거문도 주민들 입장에선 영국군을 적대시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수탈과 착취를 일삼는 조정에 비해 먹을 것과 편의를 제공해준 영국군은 고마운 존재였는지 모른다.

▲ 영국군과 거문도 주민들이 함께 찍은 사진

한편 영국군 점령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조선 정부는 외무독판 김윤식을 파견해 영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항의일 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1884년)의 여파로 전국이 혼란스러운 때였고, 영국군을 몰아낼 힘이 없었다. 결국 열강들을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조선의 편을 들어줄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영국이 거문도에 주둔하는 것이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청의 종주권만 침해받지 않는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미국은 “조선에 다른 피해가 생기지 않았으니 영국의 행동을 무조건 비난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어떤 나라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大英帝國)을 상대로 강경한 입장을 보일 수 없었다. 또 대가없이 조선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데에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내 집에 생판 처음 본 사람이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며 먹고 자도 “너희 집으로 가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도 도와줄 이웃 하나 없었던 때가 128년 전 거문도였고, 19세기 조선의 현실이었다.

영국군의 철수, 그 자리를 메운 일본

▲ 영국군 묘지. 1885년 당시에는 9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3기만 확인되고 있다.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한지 22개월 만인 1887년 2월 27일에 철수했다. 거문도 점령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러시아와의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해결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청국에 밝혔고, 러시아 역시 점령 의사가 없음을 청에게 알렸다. 영국은 러시아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모든 책임을 청이 지도록 하는 조건도 걸었다. 철수하는 그 순간까지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러시아 남하정책을 막으려 했다. 어쨌든 영국군 철군 과정에서도 주권국인 조선은 철저히 배제됐다.

거문도 사건은 조선의 무기력함을 유럽세계에 최초로 드러내는 반면 청나라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자의적으로 이용하거나 희생시켰던 19세기 제국주의 논리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후 영국은 1902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 바로 영일동맹이다. 제국주의 야욕의 연장선에 있는 이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영국으로부터 인정받는다. 이로써 일제강점의 서막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다.

박미혜/ me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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