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언론인

 
백제의 고도 부여에 있는 궁남지는 우리가 자랑하는 고대 왕실궁원의 효시(嚆矢)다. 부소산 구아리 백제 궁궐에서 대로를 따라 남쪽 끝에 조영된 궁남지는 1400년 전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왕도 부여의 애잔한 잔영으로 남아 있다.

무왕의 어머니는 궁남지에 살고 있던 과부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주 용(龍)이 나타나 과부와 사랑을 나눴으며 여기서 태어난 아들이 백제 무강왕이 됐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무왕은 효심이 깊어 어머니가 살던 궁남지를 더욱 아름답게 치장한 것인가.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무왕 35년(634 AD)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 리나 끌어 들였으며 주변의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궁남지는 왕실의 발원으로 거대한 토목공사 끝에 완공된 대역사였던 셈이다.

이보다 앞서 백제 무왕은 일본 왕실에 정원 기술자를 파견했다.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 무왕 13년(612 AD) 백제인 노자공(路子工) 지기마려(芝耆摩呂)가 일본의 궁 남쪽 정원에 수미산(須彌山) 모형과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일본 정원문화의 원류가 됐으며 백제의 정원 조영기술이 일본에 전수됐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어디 궁남지뿐이랴. 고대와 중세 우리 조상들은 정원 조영의 마술사들이었다. 조선 유교국의 선비들은 학문과 평생 접하면서 대청마루 앞에서 자연을 조영했다. 연못을 파고 꽃을 심었으며 진기한 수석을 갖다 놓고 완상했다. 그리고 난(蘭)과 죽(竹), 매화(梅花)와 소나무(松)를 심어 시심을 일깨우고 이를 시경(詩境)으로 삼았다. 자연친화적 유아(儒雅)한 선비의 삶이 그들의 이상세계였기에 그렇다.

전남 담양군 창평에 있는 ‘소쇄원’은 조선 별서정원의 으뜸으로 꼽힌다. 별서(別墅)란 본채와 멀지 않은 곳에 지은 별채. 스승인 정암(靜庵)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낙향한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가 은거, 시를 벗하며 풍류로 살다간 정원이다.

계류를 마당 안으로 끌어들이고 바위와 숲을 조영했으며 이를 완상하기 위해 제월당이란 이름의 별당을 지었다. 조선 중기 별서정원의 본래 모습을 잘 간직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화초를 심어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이미 백제 때부터였지만 조선 전기 명신이자 화가인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어 분재하는 법까지 저술로 남긴다. 세종임금이 베푼 어연에서 감귤을 하사받아 정원에다 감귤씨를 심었더니 남방지역처럼 잘 자랐다고도 쓰고 있다.

전남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가 막을 내렸다. 관람객도 많았고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뒀다고 자축하고 있다. 그러나 한 관람자는 새로운 공원문화를 엿볼 수는 있었지만, 국적 불명의 널따란 공원에 온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는 글을 남기고 있다. 그는 정원이 갖고 있는 고요함과 평화로운 휴식 공간, 아름다운 수목의 넉넉한 그늘, 문화와 생태의 교감이 아쉬웠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에 남아 있는 궁원이나 정원은 제대로 옛날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까. 궁남지 안의 포룡정(抱龍亭)은 조선시대 형태의 보잘것없는 정자로 남아 있고 연못 안에 조형됐던 방장선산이며 온갖 진귀한 모습은 복원이 안 돼 있다. 지금 모습은 본래 백제의 것이 아닌 셈이다.

선비들이 시속을 멀리하고 숨어 산 전국의 별업(別業)들도 문화재 보수라는 미명으로 옛 맛을 잃게 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걸맞지 않게 단청을 칠한 예도 있고 벽면을 시멘트로 발라놓은 경우도 있다.

한국인의 특유의 조급성과 실적주의가 격조를 잃게 하고 원형을 상실시킨 사례가 많다. 건축물이든 어떤 사업이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밀하고 보다 치밀하게 완성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번 순천만 정원페스티벌도 시간을 조금 더 갖고 ‘백제정원정신’으로 모든 것을 조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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