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청소년 중국 만주지역 항일 유적지 답사’ 동행 취재 <2>

▲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 시내와 해란강.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는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암울한 시대였다.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을 쓸 수 없게 함은 물론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역사와 문화마저 무참하게 짓밟았다. 이때 우리 선열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국만리 타국에서 죽음을 무릅쓴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에서 그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혈의 공로를 마음에 품은 이들이 있다. 민족종교 천도교 청소년들이 중국 만주지역 항일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4박 5일간 동행 취재한 항일유적지 답사 이야기를 2회에 걸쳐 특집으로 준비했다.

◆동흥학교
[천지일보=이길상 객원기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공원에서의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한 채 답사단은 용정 시내에 있는 동흥중학교를 찾았다. 지금은 그 자리에 용정제3중학교가 세워져 있다. 동흥중학교는 천도교의 교인이며 연변의 반일투쟁에서 이름 높던, 간도 국민회 사법부장을 맡고 있다가 국민회군 안무 장군의 부관으로 활약하던 최익룡 등 천도교인이 중심이 돼 1921년 4월 5일 개교했다. 초대 교장으로 최익룡이 추대됐다. 동흥중학교 역시 화성의숙과 마찬가지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마음이 씁쓸했다. 연변이 조선족자치주임에도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이 살아 있는 현장을 제대로 복원할 수 없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이 독립의지를 다졌던 일송정 기념비에서 답사단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송정… 독립의식 고취하는 상징

이어 답사단은 가곡 ‘선구자’로 잘 알려진 ‘일송정’을 찾았다. 용정시에서 약 3㎞ 떨어진 비암산에 있는 일송정은 원래 산 정상에 우뚝 선 한 그루 소나무로서 그 모양이 정자처럼 생겼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용정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곳이었으며 산 정상에 독야청청한 모습의 일송정은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상징이었다. 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이 소나무에 위해를 가해 1938년 결국 고사시켰다고 전한다. 1991년 3월 용정시 정부는 한국 각계 인사들의 후원으로 옛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어 복원하고 정자를 신축해 그해 9월에 준공했다. 그러나 일송정도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공원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일송정을 가는 길은 비포장으로 비가 많이 오면 버스가 다니지 못한다. 일송정 관리소는 있으나 역시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없어 스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일송정 주변에 널려진 쓰레기가 이곳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송정에 올랐다.

일송정에서 용정시와 굽이쳐 흐르는 해란강을 보니 이곳에서 독립을 위해 의지를 불태우던 선열들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또한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만주 벌판을 보니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 독립군들이일송정에 왜 올라왔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답사단은 일송정 정자에서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하는 ‘선구자’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답사단 학생들은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마음이 착잡하고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 용정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일송정과 아쉬운 이별을 한 답사단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생가와 그 인근에 있는 명동학교 옛터를 찾았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비교적 잘 정리돼 있었다. 뜰의 돌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적혀 있어 그의 체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에 건축한 전시관은 깨끗해 보였다. 그러나 화장실의 문을 여는 순간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공원과 일송정의 더러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명동학교는 1906년 설립됐다가 1년 만에 폐교된 ‘서전서숙’의 민족교육 정신을 계승해 서전서숙을 나온 김학연 등 애국지사들이 1908년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한 학교다. 3.1운동 때는 주민과 더불어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일제는 명동학교를 조선인 독립운동의 소굴이라 해 1920년 10월에 훈춘사건을 조작, 학교를 소각하고 교장을 구속했다. 그 뒤 학교를 재건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25년 폐교됐다.

◆3.13의사능… 반일시위운동에서 희생당한 열사들의 묘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명동학교 옛터를 방문을 마친 답사단은 연길 숙소로 가는 길에 ‘3.13의사능’을 찾았다. 옥수수밭에 가려진 이 능은 이곳 지리를 잘 알지 못하면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용정에서 4㎞ 떨어져 있는 이 능은 1919년 3월 13일 연길에서 일어난 반일시위운동에서 희생당한 열사들의 묘이다. 당시 연변에서는 조선족을 위주로 한 3만여 명의 반일군중이 연길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지방군경과 일제의 무장 탄압으로 19명이 사망했다. 현재 이 능에는 13기의 묘가 안치돼 있다.

▲ 두만강에서 바라본 북한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봉오동 유적지, 두만강
답사 4일째 답사단은 봉오동 유적지를 찾았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최진동·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와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봉오동 유적지도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길을 모르면 찾기 쉬운 곳이 아니다. 봉오동 유적지 근처에 도착했을 때 개울가에 물이 넘쳐 기념비가 있는 장소로 가기가 어려웠다. 답사단은 아쉽지만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독립군들의 희생정신을 마음에 담고 민족 분단의 현실을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인 도문을 향했다.

도문에서 북한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였다. 겨울에 강이 얼면 몇 초면 북한 땅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다. 도문대교는 약 100미터 길이로 중국의 도문과 북한을 연결하는 다리로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나타내는 선이 중간에 있다. 답사단원들은 두만강 너머로 북한을 바라보면서 하루속히 평화통일이 이뤄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염원했다.

답사단은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 옛터 방문을 끝으로 공식적인 항일유적지 답사를 마무리했다.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孔敎會)에서 세운 민족학교로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재야 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의 모교이다.

답사단은 오후 4시 45분 용정역에서 심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16시간의 긴 여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체험할 수 없는 기차여행이다.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을 마음껏 감상한 좋은 기회였다. 한편 독립군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불안과 초조 가운데 이 기차를 탔던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기차는 다음 날 오전 8시 30분쯤 심양역에 도착했다. 오후 4시 35분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남은 시간에는 심양 시내를 둘러봤다. 특히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서탑거리가 인상적이었다. 그곳에는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과 한국에서 유명한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심양을 오후 5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20여 분 만에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답사단은 4박 5일간의 만주지역 항일유적지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몸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천공항에서 김정호 단장은 “아무런 사고와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답사를 마친 것에 대해 단원들에 고맙다”면서 “답사에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바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며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을 널리 알리는 초석이 돼주기를 바란다”며 간단한 인사말로 해단식을 대신했다.

▲ 도문대교. 북한(왼쪽)과 중국(오른쪽)의 경계를 다리의 색깔로 구분할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역사 인식 전환과 역사 공부 필요성 느껴

이번 답사의 성과는 학생들이 천도교가 일제강점기에 만주지역에서 항일운동 및 민족교육을 한 것을 알게 됐고, 백두산 천지와 두만강을 보면서 평화통일의 필요성을 깨달으며, 역사 인식의 전환과 역사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데 있다.

이번 답사에 참가한 김다운(18세, 부산 동천고 2) 학생은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갈 수밖에 없는 분단된 현실이 한스럽다. 하루빨리 통일됐으면 좋겠다”면서 “중국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막기 위해 다 함께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계기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다른 참가자 최성희(24세, 여, 경희대 4) 학생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당한 독립군이 많은 것과 그 안에 천도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돼 뜻깊은 답사였다”며 “해방 이후에 단추를 잘못 끼우므로 민족이 분단됐는데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새롭게 단추를 잘 끼워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천도교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또 다른 참가자 박찬주(20세, 여. 서울대 1) 학생은 “만주라는 넓은 영토를 누비며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선열들의 흔적을 찾아 민족의 혼을 느끼며 돌아다니니,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고 우리나라 민족의 대단함을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면서 “다시 한 번 내게 이런 여행의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 답사는 정말 유익하고 재미있었던 경험으로 내 가슴속에 길이길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답사 소감을 전했다.

지도교사로 이번 답사에 참가한 김대석(부산 동천고) 교사는 “학생들이 교과서로만 배우고 이해했던 만주지역의 항일유적지와 민족교육의 현장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뜻과 희생정신을 되새기는 살아있는 교육의 시간이 됐다”고 답사 의의를 설명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항일유적지가 폐허로 방치된 모습이었다. 우리 국민이 중국을 여행할 때는 관광지도 좋지만, 항일유적지를 꼭 방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국민이 찾지 않는 유적지를 누가 관리하겠는가. 정부 관계부처와 독립유공자 관련 단체들도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항일 독립유공자,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광복된 조국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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