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산 국사봉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 지명마다 의미가 깊다. 특히 충(忠)과 효(孝)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 가운데 깃대봉, 백운산, 영취산 등과 함께 전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름인 국사봉 역시 그렇다. 봉우리에 ‘국사’란 명칭이 많지만 그중 ‘國師(나라의 스승)’가 가장 많다. 이 외에도 장차 나라에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國士’, 기울어진 나라를 통탄한 마음에 생각한다는 ‘國思’, 나랏일을 본다는 ‘國事’ 등 다양한 뜻이 있다. 여러 국사봉 가운데 향적산의 국사봉(國事峰)과 청계산의 국사봉(國思峰)을 소개한다.

유독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사상을 중요시하는 우리네다. 지금은 교사의 위신이 많이 떨어져 안타깝지만 예전엔 제자가 스승의 그림자를 감히 밟을 수 없을 정도로 사제간은 하늘과 땅이었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스승은 하늘이었다.

스승은 단순히 학문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와 인생을 가르쳤다. 이렇게 볼 때 모든 것을 통섭해야 스승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하물며 장차 나라를 다스릴 왕을 가르치는 스승은 어떠했겠는가. 왕의 선생이 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 역시 여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꼭 국사(國師)가 아니더라도 올바른 스승 밑에서 올바르게 배운 이들은 장차 나라에 큰 일꾼으로 자란다(國士). 또한 나라가 위급할 때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나라만을 생각하니(國思), 어찌 큰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인재들이 나랏일을 도모(國事)하니 정말 국사엔 심히 깊은 뜻들만이 담긴 듯하다. 이처럼 충과 효를 담고 있는 국사봉이 전국방방곡곡에 있고, 그 봉우리의 정기를 받은 우리 민족이기에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애국자가 많이 나왔나 보다.

▲ 향적산 국사봉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성계도 반한 신도안

충남 계룡시 엄사면 향한리와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를 구분 짓는 산이 향적산이다. 계룡산에서 뻗어나온 능선으로 암석이 많아 험준하다. 향적산 국사봉(國事峰)에 오르면 계룡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계룡산과 신도안을 살펴보자.

계룡산 남쪽 마을에 있는 신도안 부남리에는 암석 94기가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된 초석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이성계(1335~1408)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도읍지를 신도안으로 정하고 궁궐을 짓다 만 흔적이다. 지금도 그 일대의 지명에 동문거리, 서문거리 등이 보인다.

아쉽게도 신도안이 왕도에서 탈락한 이유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물을 얻는 형국(得水局)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땅걷기 신정일 이사장은 “신도안을 두고 자주 쓰는 말로 산줄기와 물이 휘둥그스름하게 굽이져 태극 모양을 이루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과 산의 지맥이 삥 돌아서 본산과 서로 대하는 지세인 ‘회룡고조(回龍顧祖)’라고 한다”며 “이것은 모두 계룡산과 그 주변 산천의 형세를 두고 말하는 형국론적 해석”이라고 설명했다.

신 이사장은 저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계룡산과 신도안의 풍수지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안의 마이산과 덕유산의 맥이 무주·영동·대전·회덕을 거쳐 공주로 이어지고 그 맥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의 경계를 따라 이어져 태극 모양을 이룬다고 하며, 용세가 머리를 돌려 근원을 돌아보는 고조의 형세라는 것이다. 수류는 금강 물줄기가 대전, 공주, 부여, 강경을 거쳐 금강 하구인 군산으로 빠지면서 용추골 용동리의 명당수가 청룡의 뒤를 돌아 우회하면서 금강에 합류하는 거대한 태극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수태극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향적산 국사봉. 국사봉은 향적산의 주봉으로 해발 575미터이지만 암석으로 이뤄져 산을 오르내리는 데 험하다. 완주에 걸리는 시간은 4시간 전후다.

향적산은 ‘향이 모인 산(香積山)’이라고 해두면 좋을 듯하다. 공부하고 도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의 땀의 향기가 쌓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태조 이성계가 이 향적산 정상에 올라 바로 계룡산과 신도안을 바라봤던 것이다. 그리고 새 나라의 도읍지로 신도안을 물망에 올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래서 봉우리 이름이 국사봉(國事峰)이 됐다.

왕도로 거론될 만큼 국사봉에서 바라본 신도안은 기가 막힌 명당이었나 보다. 오죽하면 비결서 <정감록>에서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양수지간에 둘레 200리 안은 난리를 피할 만하다’고 했는데 바로 이곳은 십승지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힌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도 물이 들어오지 않아 도읍지로는 부족한 신도안. 풍수지리뿐만 아니라 태조는 꿈속에서 ‘이곳은 훗날 정(鄭) 씨가 도읍할 곳이니라. 네 땅이 아니니 네 땅으로 가라’라는 음성을 들은 후 공사를 중단했다.

‘鄭(나라이름 정)’을 풀어보면 마을(阝)에서 제사를 지내는(奠) 모양으로 결국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이가 나타난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곳엔 토속 신앙을 비롯한 신흥·유사 종교인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고 그날이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 청계산 국사봉에서 내려다 본 수리산과 관악산 ⓒ천지일보(뉴스천지)


무너지는 나라를 생각하다

이성계가 향적산에 올라 신도안을 바라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나랏일을 논하였다면, 조견(1351~1425)은 청계산에 올라 쇠하는 나라를 걱정했다(國思).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형 조준(1346~1405)에게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고려의 멸망을 슬퍼했다고 한다. 조견은 자신을 송산(松山)이라고 불렀는데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을 늘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조견을 조선 개국공신이라고 한 기록도 있다.

청계산 국사봉은 경기도 성남시와 의왕시를 경계 짓는 산봉우리로 해발 540.2미터다. 서울 동작구, 인천 중구, 경기 성남, 전북 임실, 전남 영암·장흥, 경남 거제, 충남 공주, 강원 춘천 등 의미가 다른 국사봉이 도마다 여러 곳 있다. 모두 충과 효를 근간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봄의 기운이 만연한 5월, 가까운 국사봉에 올라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떠할까.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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