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주사.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 천불산 다탑봉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절 이름인 운주(雲住)는 구름이 머문다는 의미이나, 배처럼 길쭉하다하여 운주(運舟)라고도 한다. 천개의 불상과 탑이 세워지는 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천불천탑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가득해서인지 운주사에는 사람들이 쌓아올린 크고 작은 돌탑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운주사①] 편에 이어서

운주사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길산이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장소로 묘사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수많은 소설과 시에서 새 세상의 염원을 간직한 장소로 그려왔다. 실제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직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주사에서 울분을 삭이기도 했다. 운주사의 돌부처들은 불평등하고 좌절된 현실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말없이 위로해주었다.

역사문헌에서는 운주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불산은 능성현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데 그곳에 운주사가 있다. 절의 좌우 산기슭에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씩 있다”고 적혀있다.

또 조선 인조10년(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에 “운주사 금폐-운주사는 지금 폐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석불 70기와 석탑 12기가 남아있지만 원래는 탑과 불상이 각각 천개씩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유재란 이후 폐사되면서 관리가 소홀하다보니 탑과 불상이 묘지 상석으로, 주춧돌 등으로 사라지거나 크게 훼손되어왔던 것이다.

운주사는 각양각색의 탑과 불상처럼 건립설화도 여러가지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설화는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 국사에 얽힌 내용이다. 도선이 중국 유학 후 민생을 안정시키려하는데 우리나라 지형을 보니 배와 같았다. 그런데 뱃머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으며 산맥이 있는 동쪽은 무겁고 서쪽은 가벼워 우리나라 운세가 일본으로 몽땅 흘러가버릴까 염려가 됐다. 그래서 도선은 운주계곡 일대에 탑과 불상을 세워 무게중심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설화다.

또 다른 설화는 도선이 하룻밤 사이에 인근에 있는 바위를 다 몰고 와 천불천탑을 세우면 혁명이 성공하는데, 한 동자승이 ‘날이 샜다’고 거짓으로 외치는 바람에 마지막 와불을 세우지 못해 새 나라 건설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설화다.

그런데 도선(827~898)은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8세기의 인물이다. 반면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은 8세기로 추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불상과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10세기)에 운주사가 창건됐고, 고려 중기(12세기)에 천불천탑을 조성하였으며, 고려 말(13세기)에 기타 석불석탑을 세웠다고 보고 있다.

신라 말 승려 도선이 고려 중기까지 거론되는 것은 민중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 때문인데 도선의 불교는 민중을 두루 포섭할 수 있는 대중적인 불교였다. 모든 계층을 융합하는 데 가장 적합한 불교가 바로 도선이 주장하는 불교였고, ‘도선’을 내세우면 절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까지 이어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도선과 더불어 거론되는 또 다른 한 사람은 ‘동국여지지’에 나오는 관촉사 은진미륵을 창건한 혜명(惠明)스님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때 혜명은 10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되어있는데 그도 역시 훨씬 이전 시대의 사람으로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 외에도 천불천탑을 만든 이에 대한 주장은 여럿 있지만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즉, 누가 왜 운주사를 창건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많은 설화 가운데에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설화의 중심에는 항상 와불이 있다는 것이다.

[박미혜 기자]

▶ [운주사③]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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