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낙원’ 청도를 발견하다

▲ 가지산에서 바라본 운문사의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청도의 동쪽에 우뚝 솟아 청도군의 동쪽 지경을 구분 짓는 동시에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하는 운문산(雲門山).

겉으로 보기에는 산세가 험하지는 않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산으로, 가지산과 문복산으로 둘러싸인 영남의 알프스로 명산대천과 심산유곡이 어우러진 절경 중 절경이다.

또 신라 때는 군사 수련장과 병참기지가 있었고 고려 무인정권 시대에는 김사미 민란의 요새였으며, 조선조에는 활빈당의 거점이기도 했던 군사요충지가 바로 이곳이다.

산에 올라 첩첩이 놓인 산들을 보니 ‘요새’라는 말이 참으로 어울린다. 운문산 하면 운문사를 떠올리겠지만 탐방팀의 목적지는 운문산자락에 있는 ‘가슬갑사(嘉瑟岬寺)’다. 이곳이 바로 ‘화랑(花郞)’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신라 26대 진평왕 22년,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신라의 도성인 경주와도 가까운 청도의 운문산에 있는 가슬갑사에 머무르면서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 세속오계가 바로 화랑정신의 뿌리가 돼 향후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됐다. 젊은 화랑들은 원광법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기 위해 화랑의 사령탑이 거처하고 있는 가슬갑사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화려했고 왕성했던 가슬갑사는 그 터만 짐작할 뿐 흔적없이 사라졌다. 약 7년 전 식당자리를 얻어 마련했다는 지금의 가슬갑사에는 허름한 안내판과 함께 주지스님(벽송스님)과 몇몇 스님이 화랑들의 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화랑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 일대 복원조사를 1979년까지 진행했다. 삼국시대에 폐사를 당한 후 처음 이뤄지는 복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절 같으면 폐사가 됐더라도 이후 몇 번의 중창을 거쳤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이곳은 철저하게 감춰져 있었다. 그나마 박 대통령의 지시를 계기로 화랑의 비밀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본격적인 조사를 하려던 1979년 박 대통령의 서거로 더 이상 조사가 힘들어졌다.

그때까지의 조사가 남긴 결론은 “가슬갑사의 표지석을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문복산 자락 삼계리와 현재 가슬갑사가 위치한 이 일대가 화랑의 발상지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벽송스님은 “이곳은 군사요지이자 많은 야철과 질 좋은 숯이 나던 곳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보다도 더 뛰어난 무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며 “원광법사도 스님이었지만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에 신라의 젊은 화랑을 길러냈다.

그랬기에 이후 1000년간 신라가 평안히 유지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젊은이들의 정신적 푯대이자, 한 시대의 근본이 됐던 화랑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또다시 땅에 묻혔다. 지금은 관심 있는 몇몇 사학자들의 발길만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 [청도-비슬산①]편에 계속됩니다.

[이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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