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제42호 목소장 치산(治山) 이상근 명인

▲ 이상근 명인이 얼레빗을 만들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네 선조들은 머리카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여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기도 하거니와 머리를 보호해야 할 소중한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투를 틀고 갓을 쓴다든가, 머리를 곱게 땋아 댕기를 묶고, 정갈하게 틀어 올려 쪽진 머리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무형문화재 제42호 목소장(木梳匠) 치산(治山) 이상근 명인은 전통 얼레빗을 만드는 장인이다. 대수로 따지면 공조집안에서 7대째이자 얼레빗만으로는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이상근 명인.

지난 1월 취재차 들른 전주한옥마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얼레빗을 보고는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반해 그날 밤 이 명인이 살고 있는 공주로 달려갔다. 급하게 연락드리고 찾아뵙는 길임에도 반가운 얼굴로 기자 일행을 맞아준 이 명인의 웃음 띤 얼굴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공조집안의 대를 잇다

새롭게 조성된 공주 웅진동 한옥마을 작업실에서 만난 이상근 명인. 나무를 다루고, 각종 공구를 다루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작업실이 인상 깊었다. 잘 정돈된 작업실 벽 한쪽 위에는 공조가계보(工曹家系譜)가 걸려있었다.

“내가 경주 이씨 39대손이여. 내 6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공조(工曹)에서 일을 하셨지. 영조 18년 그러니까 1742년에 태어나셨는데 이 할아버지께서 당시 행군자감정(行軍資監正)을 하셨어. 화살, 말안장 등을 만드셨는데, 그게 당시에는 병과였지만 지금으로 본다면 공예하고 같은 분야로 볼 수 있지.”

벽에 걸린 공조가계보를 보며 선대로부터 지금의 명인까지의 내력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모습에서 가업을 이어가는 명인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에 따르면 선조 대대로 행군자감정, 공조참의(工曹參議), 공조참판(工曹參判), 공조선공감(工曹繕工監)을 지냈고, 부친은 예천의 목장(木匠)을 지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250년이 넘는다.

“조부님하고 아버지 두 분은 고종황실에서 근무하셨어. 그런데 아버지 때는 일제강점기라 단발령이 내려져 빗 같은 것은 못 만들게 됐지.”

작업실 곳곳에 진열된 전통장신구와 얼레빗에 대해 설명해주던 명인이 할아버지께 받은 유물을 하나 보여준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화마크가 새겨져있다. 전통적인 고종황실마크다.

이화문양이 새겨진 물건을 직접 본 것이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고종황실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갖는 의미가 더해져 그런지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대대손손 내려오는 가업이기에 별다른 문제없이 목소장의 길에 들어섰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아버지께서 목장(木匠)으로 지내셨을 때가 일제강점기였어. 단발령이 내려지고 나서 빗 만든다고 잡혀가기도 하시고 옥살이도 하셨대. 참 먹고 살기 힘들었지. 게다가 6·25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할아버지께서 고종황실에서 근무하신 것을 빌미로 친일로 몰렸어. 특히 경북 예천에서는 안동 권씨와 경주 이씨가 굉장히 파벌이 심할 때였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댁을 참판댁이라고 불렀지 않았겠어? 당시 고종황실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형제들, 육촌에 팔촌까지 거의 다 몰살을 당한거지. 아버지와 제일 가까운 친척이 8촌 정도밖에 없어. 당시 다 몰살당해서.”

그래서인가. 집안의 비극이 뼈에 사무쳤던 이 명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같은 길을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자식 중 하나는 선생님이 되길 원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잠시지만 이 명인은 교편을 잡았었다.

“한 달 반 만에 사표를 쓰고 학교를 나왔어. 그게 내마지막 직장생활이었지. 아버지 살아생전에는 내가 학교 선생인 줄 아셨어. 돌아가실 때쯤에야 당신 아들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아셨지.”

▲ 얼레빗의 종류

▶ (2)편에 계속됩니다. 

[백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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