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범수는 진나라 신하들을 의식하여 진나라 소왕에게 내정 문제를 미루어 놓고 우선 외교 문제인 영토 넓히는 방법부터 차근히 설명해 나가자 흥미를 가진 소왕은 다시 질문했다.
“위나라와는 전부터 손을 잡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나라라서 신경을 쓰지 않았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선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를 하시고 응하지 않으면 영토를 떼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될 경우는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왕은 공손히 말했다. “잘 알았소. 공의 말대로 하리다.” 범수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제가 전에 동쪽 나라에 있을 때 많은 나라의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나라의 경우 맹상군의 이름은 들었지만 정작 왕의 이름은 듣지 못했습니다. 진나라의 경우도 태후나 양후, 화양군, 고능군, 경양군의 이름은 들었지만 대왕의 이름은 들은 일이 없습니다. 본디 왕이란 자신의 뜻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들의 생살여탈의 권리를 쥐고 있는 분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진나라에서는 태후가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며 양후는 왕의 허락도 없이 제후에게 사신을 보내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화양군, 경양군은 왕의 명령도 받지 않고 백성들을 마음대로 죽이며 고능군은 왕의 결재를 받아야 할 인사 관리를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아래에 있는 관리들도 이 네 사람의 행동을 본따서 왕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나라도 일찍이 왕위를 지탱한 일이 없습니다. 나라 안을 위엄으로 복종시키고 나라 밖으로부터는 중히 여김을 받는 것이 비로소 이상적 군주라고 하는데 이 진나라에서는 양후가 왕의 권한을 쥐고 혼자서 외교 문제를 처리하고 제멋대로 군사권을 행사하여 제후를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그곳에서 얻은 이익은 자기 것으로 하고 패배하면 모든 책임을 왕에게 돌립니다. ‘열매가 많이 맺으면 가지가 꺾이고 가지가 꺾이면 나무가 죽는다.’ 하는 시 구절이 있습니다. 이와 다름없이 도읍만 살찌면 나라가 메마르고 신하가 존귀해지면 왕의 존재가 희미해집니다.

제나라의 중신 최저, 요치의 두 예를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왕을 무색케 할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최저는 주군 장공의 겨드랑이에 활을 쏘아 죽이고, 요치도 주군 민왕의 손발과 근육을 도려내고 궁전의 대들보에 매달아 하룻밤 사이게 죽게 했습니다. 조나라 명신 이태는 국정을 손에 넣게 되자 주군 무령왕을 사구대에 가두고 백일 후에 굶어 죽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진나라에서는 태후와 양후 두 사람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고 고능군, 화양군, 경양군이 이를 도와 왕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들 또한 요치, 이태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하, 은, 주 삼대의 왕조가 차례로 멸망한 것은 모든 군주가 실권을 신하에게 넘겨주고 자신들은 술과 놀이에 취하여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권을 쥔 중신들은 우수한 인재를 멀리하고 아랫사람을 핍박하고 군주의 눈을 속여 사욕을 채우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것이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왕은 어떠십니까? 지방 관리들로부터 조정의 고위 중신들과 심지어 대왕의 측근에 있는 시종들까지도 양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대왕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왕의 자손이 언제까지 왕위를 계승 받아 안존할 수 있다고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범수의 얘기를 듣고 있던 진왕은 얼굴이 굳게 경직되어 짧게 말했다. “잘 알겠소.”
그런 후 소왕은 깊은 갈등은 있었지만 얼마 뒤 태후를 폐하고 양후, 고능군, 화양군, 경양군을 자리에서 내쫓았다. 소왕은 범수를 재상으로 발탁한 후 양후는 그의 영지인 도 땅으로 돌아가 살게 했다. 그를 돌아가게 하면서 소왕은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양후의 모든 가재와 보물들을 싣고 오게 했다. 함곡관 양후의 저택에서 압수한 물건들을 싣고 오기 위해 무려 1천 대의 마차가 동원되었다. 관소의 관리가 그 물건들을 점검해 보니 왕실의 가재나 보물들보다 훨씬 많았다.

진나라 소왕은 범수를 응 땅에 봉하고 소왕 41년(기원전 266년)에 그를 응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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