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에를 담아 이름 붙여진 ‘잠두봉(蠶頭峰))’위에 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끊을 절(切), 머리 두(頭), 뫼 산(山)….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려나간 자리, 처절하고 애절한 절두산에도 봄이 찾아왔다.

꽃샘추위 뒤에 숨어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봄’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 지난 주말, ‘찰나의 봄’을 찾아 서울 한강공원에는 나들이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강공원 바로 옆에 자리한 ‘절두산 순교성지’의 봄은 아름다움과 함께 처절함이 묻어났다.

▲ 절두산 성지에는 박해로 죽어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객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뛰어난 절경 ‘양화나루’
절두산 성지가 있는 곳의 원래 이름은 양화나루. ‘버들꽃나루’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조선시대 버드나무가 무성했으며 서울에서 뛰어난 경치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아 이름 붙여진 ‘잠두봉(蠶頭峰)’ 절벽과 유유하게 흐르는 한강의 조화는 일품이었다. 당시 숱한 시인, 문인들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기거나 시를 짓기도 했으며, 중국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었다고 한다.

▲ 절두산성지 순교자기념상. 이곳의 첫 순교자 가족인 이의송․김예쁜 부부와 아들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손에 밧줄이 묶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주교 박해로 흘러내린 피
하지만 조선 후기,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병인양요와 이로 인한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붉은 피가 땅을 적셨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양화진)까지 와서 우리 강물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야 한다”며 이곳을 보란 듯이 천주교도들의 사형지로 삼았다.

이에 1866년부터 이의송 프란치스코와 김예쁜 마리아 부부를 비롯해 ‘최소’ 33명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최소’라는 단서가 붙는 이유는 이곳에서 순교한 사람들 중 33명만 그 이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 이름 외에는 기록도 남지 않을 만큼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박해와 처형이 이뤄진 것이다. 박해 이후 천주교인들이 ‘순교지 매입운동’을 통해 부지를 확보하고, 박물관 등을 세우면서 오늘날 중요한 순교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지금 그들(순교자들) 모두는 자신의 꿈을 나누고자 여기에 우리를 초대한다’는 기념비문의 글귀처럼 성지 탐방은 그들이 꾸던 꿈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과연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

성지에선 동상, 묘비 앞에서 기도하거나 한참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떼는 이들, 곧 ‘순교자들의 꿈에 초대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천주교 모습이 한눈에
성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웅장한 크기의 박물관이다. 20m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절두산순교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1972년 제작된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이 있는데, 이곳의 첫 순교자 가족인 이의송 부부와 아들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위에는 부부의 얼굴이, 그 아래에는 아들의 얼굴이 기울어진 형태로 얹혀 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밧줄에 묶여 있는 그들의 손을 발견하게 돼 처절한 아픔이 전해진다.

박물관은 세계 건축 설계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차지했을 만큼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데, 절두산 성지 설명에 따르면 궁궐의 기둥과 같은 화랑의 원주, 옛 초가집 지붕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을 하고 있는 성당의 천개 등이 옛 정취와 포근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박물관 안에는 ‘천주실의’를 비롯해 이벽․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 유품, 베버 신부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1915)’ ‘기해․병오 치명증언록’ 등 우리나라 천주교 창립과 초기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옆에는 성당과 성인유해실이 들어서 있다.

▲ 천주교 박해 당시 사용된 형구와 형장 등을 만날 수 있는 박물관. 봉사자의 안내에 따라 직접 체험도 가능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형구․형장 박물관에선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모형들과 형구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러 고문, 사형도구들을 보고 만져보며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당시의 상황 속으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

박물관 안내자는 형구들에 대해 설명하던 중 “당시 사용된 형구돌을 보면, 여전히 붉은 빛이 도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며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해의 아픔과 상처는 10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남아 있는 걸까.

▲ 천주교 박해 당시 사형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성지 안내자에 따르면 가운데 부분에 여전히 피가 흘러 생긴 붉은 색이 눈에 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오성바위 등 성인들의 흔적
박물관 밖 야외전시장에는 순교자들의 발자취와 관련된 석상, 기념비들이 전시돼 있다. 성모동굴과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커다란 입상과 작은 좌상, 척화비 등이 있다.

또한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성인이 처형장인 충남 갈매못으로 끌려갈 때 쉬며 신앙을 다짐했다고 전해지는 ‘오성바위’와 예수가 십자가 지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십자가의 길 15처’도 성지를 지키고 있다.

이같이 잔인했던 천주교 박해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흔적을 찾아 절두산 성지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절두산 성지에는 여러 동상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그중 동굴 속에 성모마리아 동상이 세워져 있는 성모동굴.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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